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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텃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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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Nov 18. 2020

텃밭일기 #54, 20201118

  이제 서서히 추워지겠지 했지만, 그런 생각은 이내 무색해졌다.  완연한 봄 같은,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다.  배추를 묶고 나는 이제 좀 쉬어야겠다 했던 마음이, 불안함을 안고 서성이는 것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비는 오지 않고, 아침마다 약간의 이슬이 내려 있었다.  텃밭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하기 좋은 날씨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언가 할 만한 일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그저, 따스한 날씨에 살포시 부는 바람을 즐길 뿐이었다.  마당에서 오후의 햇살을 즐기던 반려견 녀석이 일어나서는, 텃밭을 살피러 나온 나에게 다가와 앞발을 갖다 대며 놀아달라고 헥헥거렸다. 

  텃밭에 손대는 일이 방법이나 시기상으로 서투른 것은 전적으로 내가 공부를 게을리한 탓이다.  시기에 따른 날씨 예측이 어긋나는 것은, 그와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굳이 말하자면 그 흔히 회자되는 기후변화를 이유로 들 수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적절한 시기라고 생각해 텃밭에 손을 대었고, 텃밭을 운영할 수 있는 여건과 여력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손을 놓는다.  SNS에는 지인이 농사지은 배추가 속이 꽉 들어찬 채 아직 묶여있지 않았고, 출근길 옆으로 보이는 밭에는 작업복 차림의 할머니들이 무리를 지어 나란히 앉아 양파 모종을 심고 있었다.  아, 나는 여전히 시기나 방법에 있어 서투르고, 점점 공터가 되어가는 텃밭을 게을리 두고 있구나..  같은 깨달음이 여러 번 반복되면 그것은 노력하지 않아 생기는 무지와 게으름일 것이다. 


  반복되는 아둔함의 절반에는, 겨울 시즌엔 다른 일을 위해 손을 좀 쉬겠다는 이유가 있으니 마음은 덜 불편하다.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은 이 따스한 늦가을의 나날에 좋았던 것은, 따스한 바깥공기를 느끼며 가을의 결실들을 즐겼다는 데 있었다.  미리 따 놓아 창고에 후숙한 감은, 감을 좋아하시는 장모님이 오셔서 반 이상을 드셨다.  늦가을의 적당한 추위에 불멍이라도 즐길까 싶어 준비해 두었던 장작은, 조카들이 놀러와서 어두워진 밤을 즐기는 데 사용되었다.  서둘러 마무리를 하는 듯했던 바질과 로즈마리는, 따스한 날씨에 왠지 어리둥절해 보였다.  빛바래던 바질 잎이 좀 더 초록으로 생기를 머금었고, 짙게 메말라가던 로즈마리 잎도 조금 토실해 보였다.  녀석들을 잘라 닭다리살에 양념으로 넣고, 차콜로 가열한 그릴에 구웠다.  볕이 부담스럽지 않았던 주말 오후에, 우리는 그렇게 선물처럼 주어진 봄날 같은 가을 온기를 즐겼다.  

  따스한 날씨에 멕시칸 부시 세이지는 명주솜 같은 가느다란 자줏빛 꽃을 오래 간직했다.  그 아래로 타라곤의 주황꽃이 오밀조밀하게 모여 생생했다.  그 사이로 꿀벌이 날아다니고, 앞집 돌담 위에서는 길고양이들이 볕에 졸면서, 급식소에 언제 사료가 놓아지나 기다리고 있었다.  돌담 아래로, 시들어가던 호박덩굴이 다시 새 잎과 꽃을 피웠고, 빠르게 익어가던 늙은호박은 날씨에 잃어가던 초록을 조금 더 오래 여미었다.  이 날씨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하는, 약간의 걱정과 적지 않은 기대가 뒤섞인 마음이 생겼다.  결국 한기섞인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겨울은 오기 마련이고, 겨울이 오고나면 그런 마음은 그저 욕심이자 사치였을 뿐임을 다시 반복해 깨달을 것이다.  다시금 깨닫는 나의 무지와 게으름, 나를 비롯한 인간이란 그저 그런 존재들이다.  허망한 기대를 품을 그 시간에 지금 이 순간을 충만하게 즐기고 느끼면 그만인데 말이다.  

  다시 추워진다고 한다.  오늘은 여전히 따스하지만 하늘은 왠지 불안하고 비가 내릴 것 같다.  예보는 곧 비가 내릴 것이고, 비가 내린 후에는 바람이 불며 추워진다고 했다.  추워지면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일 따위는 급격하게 줄겠지만, ‘불안함에 서성이는 것 같은’ 마음 역시 크게 줄어들 것이다.  마음 편안히, 손을 놓는 대신 다른 일에 손을 댈 것이다.  겨울은 그런 면에서 기대를 품게 한다.  그러고 보니, 퍼석하게 시들어가던 땅콩잎들이 떠오른다.  아직 덜 여문 것 같아 캐내지 않았던 녀석들, 이번 주말에는 어쩔 수 없이 땅콩을 캐야겠구나..  이번엔 시기를 놓치는 우를 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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