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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텃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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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Dec 07. 2020

텃밭일기 #55, 20201207

  날은 추워지고, 텃밭은 아무렇게 자라고 있었다.  묶어준 배추 속은 잘 차고 있는지 살피지도 않았다.  그저 잘 자라겠지..  게으름은 다짐하기도, 실천하기도 아주 쉽고 편했다.  그러다가 곳곳에서 김장소식이 들렸다.  토요일 진료를 마친 나는, 가족들과 점심으로 외식을 하고 잠깐의 나들이를 즐긴 다음, 집에 돌아와 창고의 작은 칼을 들고 텃밭으로 들어갔다.  배추의 밑둥을 자르고, 묶었던 끈을 잘랐다.  스무 포기 남짓의 배추 중 나름 큰 것들을 골라 잘라낸 것이 열 두 포기였다.  그게 일반적으로 크고 넉넉하게 자란 것인지는 의문이지만, 내 텃밭 안에서 자란 배추들을 크기순으로 나열해서 고른 것은 맞았다.  자른 것들을 마당으로 들고 가는데, 무게가 조금 헛헛했다.  게으름은 이럴때 후회를 남긴다.  


  무와 쪽파도 뽑았다.  무는 잘 자라지 않아서 큰 것이 어른 주먹 두 개 크기를 간신히 맞출까 싶은 정도였다.  여덟개 정도 뽑으니 배추 양과 얼추 맞을 것 같긴 했다.  쪽파도 크기나 굵기가 잘아서, 손질만 귀찮았다.  그래도, 손을 놀려야만 했다.  사실 가을 텃밭은 지금 이 순간, 김장을 위한 과정이다.  계절 하나를 조금 넘기는 적당히 긴 시간의 기다림과 소소한 돌봄의 결과로, 이벤트 또는 작은 의식을 벌이는 것이다.  

  배추 겉잎을 정리하고 반으로 갈라 속을 물로 씻었다.  모종때 한 번 방제를 한 이후로 방치했더니 배추는 온갖 벌레들의 월동처가 되어 있었다.  물로 깨끗이 씻어냈다.  소금물을 만들어 이파리 부위를 담그고 물 밖으로 드러난 옹이부위에는 소금을 넉넉히 묻혀 숨을 죽였다.  무청을 자르고, 물로 씻었다.  쪽파는 아내와 나란히 앉아 열심히 다듬었다.  자잘해서 귀찮아도, 얼마 되지 않는 양을 둘이서 다듬으니 금방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소금물에 담궈 소금을 묻힌 배추가 간이 적당히 배면서 숨이 제대로 죽어주어야 했다.  해가 일찍 저문 토요일 저녁의 고민이었다.  제주배추는 김장을 담그면 물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바닷물에 배추를 절인다고 했다.  소금물에 배추를 담근 것은 이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응용해보는 이 방법이 좋은 결과를 내 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저녁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맥주 몇 병을 마시다가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마당으로 나가 배추를 살폈다.  배추는 잘 절여진 듯 했다.  깨끗한 물에 두세 번 씻어서 물이 잘 빠지게 쌓은 다음 무거운 도마로 눌렀다.  줄기 하나 뜯어 맛보았더니 간은 괜찮았다.  


  다음날 이른 아침, 아내는 육수를 만들었다.  냉동실에 있던 구이용 조기 두 마리, 동태포, 다시마를 물에 넣고 끓였다.  살이 다 풀어졌을 때 걸러서 육수만 모았고, 식힌 다음 찹쌀가루를 넣어 다시 끓이며 묽게 풀을 만들었다.  그 사이, 나는 물이 빠진 배추를 집 안으로 옮겼고, 양념을 만들고 작업을 할 커다란 대야를 준비했다.  무는 채썰이 도구에 갈아 채를 냈다.  양파와 생강을 추자도산 멸치액젓 약간과 함께 갈아서 대야에 담았다.  다진 마늘도 넉넉히 넣고, 고추가루와 새우젓도 넉넉하게 넣었다.  적당히 식은 육수풀과 멸치액젓을 붓고, 손에 장갑을 끼고 주저앉아 열심히 섞었다.  조금씩 간을 보아가며 마늘과 멸치액젓, 새우젓으로 맛을 더했다.  양념이 약간은 짜야 나중에 간이 맞는다는 어른들의 조언은, 김장할 때마다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처럼 머리속에 또렷하게 살아났다.  어느덧 맛이 풍부해지고 간도 약간 짜게 되었다.  맛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채썬 무와 적당한 길이로 자른 쪽파를 넣고 버무렸다.  생새우도 넉넉히 넣고 버무렸다.  묽은 듯 하면서도 걸쭉하게 버무려진 김장 양념은 보기에도 맵고 맛있어 보였다.  절인 배추를 가져와 이파리 사이사이로 양념을 넉넉하게 버무렸다.  배추를 가른 면이 위로 올라오도록 잘 모아서 김치통에 차곡히 쌓았다.  군침도는 붉은색과 이파리 사이로 적당히 섞인 다대기들이 마음을 뿌듯하게 했다.  열심히 배추에 양념을 버무려 김치통에 담으니 한통을 가득 채웠다.  얼마 안 되는 포기수에, 벌레먹은 이파리들을 정리했더니, 절여진 배추의 부피는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김치통 하나에 충분히 담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양념에는 미리 사서 씻어놓은 굴을 넣었다.  잘 버무려서 남은 포기에 잘 버무렸다.  김장의 정수는, 굴을 넣은 양념을 배추에 잘 버무려 바로 내놓은 김장김치다.  붉은 양념에 잘 버무려진 굴이 넉넉하게 들어간 김치는, 내가 가을텃밭을 운영하고 보잘것 없는 결과물들로 어떻게든 김장을 하는 중요한 이유들 중 하나다.  

  수육을 삶았다.  제주돼지 오겹살을 통으로 삶아 두텁게 썰어냈다.  약간의 시간을 두니 접시에 담긴 김장김치에는 물이 생기기 시작했다.  소금물에 담가 숨을 죽여 그런지, 예전의 김장보다는 덜 생기는 듯 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옆에 제주막걸리를 한 병 두고, 이제 막 양념이 배기 시작한 김치줄기를 뜯어서 다대기양념과 굴과 함께 수육 한 조각 위에 올렸다.  잔에 막걸리를 부어 한 잔 마시고, 수육과 김치와 굴을 한 입에 넣었다.  그 황홀감, 달달하고 짭짤하고 아삭하고 매웠다.  거기에 갯내음이 은은하게 모든 감각을 감싸 안았다.  뿌듯함, 황홀감, 만족감, 즐거움이, 미각이라는 가장 원시적인 감각 안에서 균형있게 뒤섞이고 파도쳤다.  이 순간의 감각은 어느 곳에서도 느낄 수 없는 오롯한 나만의 것이었다.  더구나, 올해의 김장은 기대보다 더 맛있어서 만족은 더욱 커졌다.  이 충만한 감각과 만족을 밤새 즐기고 싶었지만, 월요일을 앞둔 일요일 저녁은 부담스러웠고, 점점 주량이 줄어드는 몸은 막걸리 한 병으로 족하다고 경고했다.  맛은 있었지만 아무래도 막 버무린 김장김치는 조금 짜서, 입 안에는 벌써 짠맛과 마늘과 고추가루의 알싸함이 은은하게 맴돌고 있었다.

  직접 담근 김장은 사실 보잘것 없지만, 의미는 소소하지 않았다.  직접 기른 배추와 무와 쪽파로 만든다는 뿌듯함, 벌레가 한 가득이지만 그것을 열심히 씻어내어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손질하는 수고, 해마다의 경험으로 감각을 쌓아가는 어떤 자신감, 모든 것이 우연이나 수동이 아닌 스스로의 의지로 겪어낸 것들이다.  그러니 결과는 왜소해도, 마음가짐은 단순하거나 가볍지 않다.  올해엔 맛까지 좋으니 말할 나위없이 만족스러울 뿐이다.  이렇게 텃밭의 한 해를 마무리했다.  사계절 밭이 푸르른 제주에서 겨울 텃밭을 이어나갈 수 있겠지만, 올해 텃밭은 쉬어두기로 다짐했으니 더 이상은 몸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익어가는 김치에 수육이나 홍어를 얹어 막걸리와 함께 종종 즐길 생각만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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