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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텃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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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Dec 25. 2020

텃밭일기 #56, 20201225

  날이 제법 추워졌다.  한라산에는 일주일 넘게 중턱까지 구름이 덮여있었고, 출퇴근하는 평화로에는 눈이 내려 쌓였다.  모질던 바람이 잠잠해지고 산을 뒤덮었던 구름이 걷히자, 상고대가 포슬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고 기온이 떨어지면, 멀리 보이는 바다에도 하얀 물결이 있었다.  낮은 들판을 따라 북풍이 불면, 그 바람은 그대로 우리 집 마당으로 들이닥쳤다.  습기가 느껴지지 않는 그 바람에 감나무 잎이 모두 떨어졌고, 뒤늦게 주홍색 꽃을 피운 타라곤이 메말랐다.  바람은 약간은 구석진 듯 위치한 텃밭을 한번 휘감고 지나갔다.  늦게까지 검보랏빛을 발산하던 일본가지의 이파리들이 메말랐고, 끝까지 맺어내던 가지열매들이 올망졸망한 채 시들었다.  고추와 바질은 이미 말라붙어 겨우 초록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스산했던 텃밭은 더욱 스산해보였다.  김장을 한다고 심은 배추와 무의 반을 뽑고, 자잘하나마 좀 자란 쪽파들을 솎아내듯 뽑고나니, 황량함은 더 깊어보였다.  호박덩굴들도 다 말라버렸고, 가장자리를 차지하고 서 있는 나무들의 이파리들도 다 떨어졌다.  텃밭을 관통하는 시야는 넓어졌지만, 그게 좋게 느껴질 리가 없는 계절이다.  더운날의 북적이고 풍만했던 이 공간이 추워지며 황량해지는 반복은 이제 익숙해서 아무렇지 않다.  풍경의 변화에 얹어보는 작은 고민은, 반복의 의미는 존재하는가, 반복을 통해 좀 더 나아지는가, 그런 것들이다. 

  여전히 뭔가를 잘 알지 못한 채 일을 벌인다.  그런 반복은 경험의 시간만을 늘릴 뿐, 좀 더 나은 결과를 내지도 못한다.  이미 축적된 지식이나 지혜에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들을 추려내는 노력이 없으니, 반복은 자연의 섭리를 따른다 해도 매너리즘의 굴레 안으로 자연스레 흐른다.  내년에는 다시 이 공간을 무엇으로 채울까라는 고민을 얹어보지만, 알지 못하니 새로움이나 적절함은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꾸준함이 전부인 반복을 이제 돌아 볼 때가 되었다 싶어진다.  나는 텃밭이라는 공간에서 그저 몸을 놀리는 노동을 원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노동에 걸맞는 충만한 결실을 원하고 있는지 말이다.  충만한 결실을 원한다면 그에 걸맞는 노력에 쏟아부을 에너지는 가지고 있는지, 다시 궁금해진다.  


  땅이 쉴 틈 없는 곳이 이 섬이다.  집 주변의 밭에는 겨울바람에 브로콜리가 쑥쑥 자라서 공간을 가득 채웠다.  무 이파리가 파릇하고, 대파는 이른 아침 불부터 피운 농부들이 분주하게 거두고 있었다.  손대지 않은 공터에는 누렇게 말라버린 잡초들로 새들과 고양이의 생태계가 만들어졌다.  텃밭도 푸르게 변하고 있었다.  겨울 잡초들이 땅의 영양분을 먹고 양탄자같이 땅표면을 뒤덮고 있었다.  조금 거둬내야 하나 싶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저 잡초들 사이로는 더운날 아무렇게나 뿌려둔 고수가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리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쪽에서는 캐모마일이 주먹만하게 공간을 차지하며 저들끼리 공간을 채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쪽에서 알아서 자라더니 꽃을 피웠던 부추도 시든 꽃망울에서 검은 씨앗을 흩뿌렸다.  거두어야지 했던 땅콩도 이래저래 손을 대지 못하였으니, 내년에도 텃밭의 곳곳에는 땅콩이 싹을 틔울 것이다.  두어번 심었던 감자가 계절마다 여전히 싹을 내며 번지고 있듯 말이다. 

  장갑을 끼고 시든 녀석들을 여전히 지탱하고 있는 지주대부터 뽑았다.  서른 개 남짓한 철 지주대를 모아 집 뒤켠에 두었다.  시들어도 먹을만한 고추와 가지를 골라 거두었다.  줄기를 잡고 당기니 메마른 땅에서 뿌리가 쉽게 뽑혔다.  고추와 가지, 그리고 바질을 뽑아 집 뒤뜰로 옮겨 쌓아두었다.  겨울바람에 마르고 나면, 불을 붙일 것이다.  어지럽게 뻗어 있는 호박 덩굴도 치웠다.  마지막까지 몸집을 불리다 결국 추위에 굴복한 진초록의 호박들을 거두어 모았다.  그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텃밭은 더욱 황량해졌다.  그 모습이 이 계절과 잘 어울리는 풍경이라 위안하며 장갑을 벗었다.  추웠던 며칠이 지나고 약간의 바람이 불던 초겨울의 어느 주말, 텃밭에서 나오는 나를 보며 반려견 녀석이 꼬리를 격하게 흔들며 나에게 다가왔다.  놀아달라는 몸짓이었다.  녀석은 내가 찬 공을 뒤쫓다가, 장갑을 벗은 내 손을 핥다가, 몸을 뒤집었다.  녀석은 이 계절의 추위를 그리 버거워하지 않았다.  녀석과 놀아주며 둘러 본 마당의 나무들엔 이파리가 거의 떨어져 줄기만 흔들렸는데, 바람따라 연신 허리를 숙이는 겸손한 티트리 나무의 끄트머리들에 연두빛 새순이 맺혀있었다.  게으르고 의미가 없어도, 반복은 다시 이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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