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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텃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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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Jan 12. 2021

텃밭일기 #59, 20210112

  소출보다는 마음을 내려놓는 공간이었어도, 텃밭에서는 몸을 놀려야 했다.  몸을 움직여 땅을 뒤집고 모종을 심었다.  잡초들을 거두어 주어야 작물들이 제대로 자랄 수 있었다.  먹을 만큼 커진 고추와 가지를 처음 거두는 날엔 마음이 부풀었다.  생기 가득한 고추를 장에 찍어 베어 물 때의 아삭함은, 마트에서 사 온 고추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싱싱함이었다.  전분을 살짝 묻힌 가지를 튀겨 뜨거울 때 베어 물면, 거두자마자 갓 조리한 채소의 달고 풍부한 즙이 입안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보람이었다.  온전한 나의 노동으로 느낄 수 있는, 감각의 오롯한 정점이었다.  그래서 텃밭의 노동은 위안이자, 보람과 즐거움이다. 


  몸을 움직이는 일은 자체로 나를 차분하게 만들었다.  확실한 것은, 나는 몸을 움직이는 일이 적성에 더 맞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몸을 더 많이 써야 하는 외과를 선택한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임상의학이라는 막막하고 깊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작은 밭뙈기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그저 순수하게 몸을 움직이며 마음을 풀었다.  순수함은 그대로 무식이어서, 오로지 몸만 움직였다.  나의 노동은 그래서 소출을 고민하지 않았고, 나의 텃밭에서 어떤 작물이 잘 될까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받아야 하는 중압에 비례한 노동만을 풀어낼 뿐이었다.  


  땅은 알아서 먹을 것을 내어 주었다.  그러나, 인간이 노동하면 그만큼 먹을 것을 더 내어 주었다.  어떻게 노동하면 땅에서 먹을 것을 더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나보다 더 많은 먹거리를 땅에서 거두었다.  집 주변으로 넓게 펼쳐진 밭에서는, 네모로 구획진 넓은 공간에 두어 명의 농부들이 점처럼 움직이며 먹거리를 길러냈다.  그들에게는 농사가 생계의 수단일테고, 단순하게 텃밭에서 고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노동과 고민을 이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생존에 필요한 것은 노동에서 비롯되었다.  땅에서 바다에서, 내가 보이는 시야 안에서는 먹거리는 누군가의 노동으로 생산되었다.  지금 읽고 있는 한승태의 노동에세이에서는 우리가 즐겨먹는 닭과 돼지가 인간의 어떤 노동에서 비롯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윤리, 복지, 환경 등등의 구체적인 고려를 일단 제쳐둔다면,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먹거리는 분명 인간의 노동에서 비롯된다.  

  풀모기에 뜯기고 흙먼지 뒤집어쓰며 땀에 절어 고추를 거두면, 누군가는 ‘그냥 사 먹는게 낫겠다.’라고 했다.  그 누군가는 한 두명이 아니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 말에 화가 나기보다는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상대적으로 아쉽지 않은 벌이를 하는 의사가, 쉬는 날 마트에 가서 식재료를 사서 간단하게 조리해 먹거나 외식을 하고, 남는 시간을 편하게 쉬는 것이 차라리 합리적이다.  아쉬울 것 없는 입장에서 굳이 땀흘려가며 노동을 해서 먹을 것을 생산하는 일이, 그것도 대단하거나 충분하고 다양하게 생산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러나 싶을 때도 있었다.  이제 막 거둔 식재료의 생기와 신선함을 즐기기 위해서라는 말은, 편리가 삶의 상위가치인 세상에서는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  그래서 더 건강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나, 텃밭을 즐기며 깨달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노동없이는 생존에 필요한 먹거리를 만들 수 없다는 절대 진리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없는 가치증식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그 정도가 과하면 비판과 조절의 여지가 있지만 말이다.  ‘그냥 사 먹는게 낫겠다.’ 라는 말이 너무도 쉽게 납득되는 이유는, 자본주의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본능처럼 구조적 설득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교환수단이 아무리 많아도 먹을 것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사실이 간과되어 있다.  또한, ‘남의 노동으로 내가 편하게 먹고 살 수 있다’는 합리적 이기심도 내재되어 있다.  생산노동의 가치수준은 합당한가, 단순한 교환수단이 가치 자체로 변질되어버린 자본주의 시대의 우울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노동하지 않으면 생존도 불가능하다’라는 가장 단순한 진리가 망각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텃밭은 가장 단순한 노동을 통해 가장 단순한 진리가 삶의 가장 밑바닥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사 먹는 게 낫겠’지만 ‘사 먹지 않고 노동해서 먹는’일이 먹고사는 생존에 더 가까이 위치해 있음을 텃밭이 알려준 셈이다.  


  집이나 건물 몇 채를 사두고, 정부 정책이나 개발환경에 따라 변하는 가격차익으로 불로소득을 누리며 사는 삶이 최고인 세상을 살아간다.  책상앞에 가만히 앉아 핸드폰이나 컴퓨터 모니터에서 시간마다 변하는 그래프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이 회사 주식을 저 회사 주식으로 옮겨가며 단순한 클릭질로 수익을 창출하는 수완을 명민하다 칭찬받는 세상이다.  다시 말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품을 가지고 놀 지언정, 가치를 창출하는 일이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다만, 노동으로 창출하는 가치보다 가만히 앉아 누리는 불로소득의 가치가 더 커진다면, 인간의 삶은 의미가 축소되고 계급간 경제적 격차는 심각하게 벌어진다.  이는 분명히 비판하고 견제해야 할 일이다.  동시에, 결국 거품뿐일 이런 가치놀이에 망각된 가장 중요한 사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생존에 필수적인 의식주는 분명 노동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 말이다.  의식주에의 노동이 거품가치 놀이보다 하찮은 일이 되어버린 현실은 그래서 슬프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근본에서 고민하게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들만 이어가니, 아직도 제대로 된 개원도 못하고 엉성한 틀 위에서 이상이나 쫓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어쨌든, 텃밭은 나에게 근본의 진리 하나를 툭 하고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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