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지면 공기가 선선해졌다. 낮에는 여전히 덥다고 했다. 진료실에 종일 앉아 있는 내가 느끼지 못하는 더위다. 그러니, 해지고 선선한 저녁공기에 여름이 지나가는구나 할 뿐이다. 퇴근하자마자 마당의 라이와 반갑게 인사하다보면, 점점 어두워지는 것을 실감한다. 서쪽하늘의 구름에 걸친 노을이 요즘은 무척 아름답고 열정적이다. 한여름에는 해가 져도 더워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핑계를 대었는데, 이제는 어두워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핑계를 댄다. 배를 뒤집고 꼬리를 흔드는 라이녀석을 좀 더 쓰다듬어 준 다음, 텃밭으로 들어가 맵지 않을 만한 큼직한 고추 대여섯 개를 따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처서라는 절기가 지나자마자 공기는 달라졌다. 이제는 정말 가을이 오는구나 실감한다. 농사를 짓는 SNS 안의 친구들은 무 씨를 뿌리고 모종을 준비하며 가을농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선선해진 공기를 즐기며 잠시 마음의 여유를 즐기다 문득, 나도 가을텃밭을 준비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때와 시기가 중요한 농사는 이래서 잠시도 쉴 수 없는 일이다.
가을텃밭 준비라야 별다를 것이 없었다. 무 씨를 파종하고 쪽파와 배추 모종을 심을 자리를 만들면 그만이다. 그런데, 작은 텃밭에 그럴 자리를 만드는 일도 고민스럽다. 자리가 잘 나지 않기 때문이다. 적은 양이라도 뿌리고 심으려면 넉넉한 자리가 필요한데, 텃밭은 봄에 심은 것들이 아직 한창이다. 그것들을 일부러 걷어내는 일은, 마음이 아프고 불편한 일이다. 깨물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 일인 것이다.
오전 진료를 마치고 퇴근하는 날, 마침 오일장날이었다. 나는 바로 오일장으로 차를 몰았다. 가을 모종 준비는 단촐하다. 배추모종 몇 개, 쪽파 한 되, 포장된 무 씨앗 한 팩을 사는 일이 오일장 방문 목적의 전부였다. 거기에 가을 상추를 조금 심어볼까 싶어 상추모종을 조금 더했다. 할망장터에는 자기 집에서 직접 키웠다는 가지 여주 호박 등등이 소쿠리 위로 다소곳했고, 곳곳의 먹거리들이 아직 점심을 하지 못한 나를 유혹했다. 떨치고 나와야 다음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목적을 달성한 나는 서둘러 오일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우선 텃밭으로 들어가 거두어야 할 것들을 거두었다. 일주일에 한 번 거둘까 하는 의도하지 않은 게으름 때문에, 텃밭은 쇠어가기 시작하는 호박과 가지들로 넘치고, 빨갛게 익어버린 고추들로 가득했다. 나는 아예 큰 소쿠리를 한 손에 들고, 가위로 호박과 가지들을 잘라 거두었다. 고추들은 빨갛게 익은 것들 먼저 거두어내고, 먹기좋게 자란 풋고추들을 골라서 빨간 고추 위로 담았다. 문득 텃밭 가장자리를 보니, 세 그루의 무화과 나무에 자색으로 익은 무화과가 즐비했고, 이미 많은 것들은 새들과 풍뎅이들의 좋은 식사감이 되어 있었다. 나무를 살펴, 아직 파먹지 않은 익은 무화과들을 거두어 고추 위로 담았다. 꺾인 꼭지에서 하얀 진액이 방울방울 흘러 나왔다.
올해는 너무 가물어서, 열매들이 부실했다. 그리고 가뭄에 취약한 것들은 견디지 못하고 말라죽었다. 토마토가 대표적이었다. 올해 토마토는 열매줄기 몇 개에서 빨갛게 익어가나 싶더니, 가뭄에 말라 비틀어져 버렸다. 그것들은 결국 걷어내야만 했고, 그 자리는 가을 모종들의 자리가 될 것이었다. 오이도 말라버렸다. 지지대를 높게 세운 자리들이어서, 토마토와 오이가 타고 오르던 지지대와 그물망을 걷어냈다. 잡초들을 정리하고 이랑 하나 반 정도를 확보했다. 깻잎은 이제 잎이 작아지고 벌레먹기 시작했다. 바질은 바로 옆의 고구마 줄기들의 습격을 받아 뒤덮여 말라 죽었다. 모두 거두어 내고 자리를 만들었다. 텃밭에 듬성듬성 이가 빠진 것 같이 자리가 생겼다. 이빠진 자리들마다 모종을 심고 씨를 뿌리자니 참 번거롭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멀쩡히 잘 있는 녀석들을 몇 그루 뽑아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과감하게 자리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올해 가을 텃밭은 듬성하고 볼품없는 모습이 될 것 같다.
낮엔 정말 더웠다. 진료실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더위가 아직 머물러 있었다.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는 건, 겸손을 배우는 일이다. 더위를 안고 일해야 하는 사람들, 그 더위를 에어컨 빵빵한 진료실 안으로 들어와 말로 전하면, 나는 그러려니 할 수 있는, 운이 좋은 위치에 앉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지금, 그 더위에 땀을 흘리고 땀에 흙먼지 범벅이 되고 풀모기를 붙이며 그늘과 텃밭을 오가고 있다. 여전히 물을 제대로 마시지 않으면 안될 더위였고, 수시로 그늘에서 쉬어주지 않으면 안될 햇볕이었다. 그래도, 그늘 아래 의자에 앉아 있으면 공기는 확실히 달랐다. 바람이 불면, 땀이 식는다는 표현이 어울릴만큼 시원했다. 감사할 일 아닌가. 시원한 바람 한 줄기에 살만 하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가을 텃밭 자리는 좀 더 고민을 해서 자리를 만들어야겠다. 덥기만 했던 여름이 지나니, 에너지를 한가득 품은 태풍이 많은 가을이 될 거라는 경고가 들린다. 오일장에서 사 온 모종들을 심을까 하다가 한 주 지켜보기로 했다. 날이 가무니 흙도 메말라서 모종들이 힘들 수 있기도 했다. 그간 모종들이 시들지 않게 물을 열심히 주어야 한다. 거둔 고추와 가지는 반을 덜어서 같이 운동하는 검우들에 나누어주었다. 주말의 한나절을 필로티 아래 그늘에 앉아 보냈다. 볕은 덥지만 바람은 시원해서 좋았다. 불을 피웠고, 팬을 올려 고기를 구웠다. 거둔 가지를 고기 옆에 같이 구웠고, 뽑은 깨에서 아직 먹을 만한 깻잎을 꺾어 쌈채소로 먹었다. 와인과 맥주를 곁들이고, 후식으로 무화과를 먹었다. 쌈장에 아직 많이 달린 고추들을 따와서 찍어먹었다. 간간히 매운 녀석들이 섞여 입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모종심는 시기도 그렇고, 무 씨를 파종하는 시기도 너무 늦으면 안될텐데 하는 생각이 가슴 한 켠에 자리를 틀어서, 해 있는 시간에 먹고 즐기는 일이 조금 거슬리기도 했다. 어서 자리를 만들고 심고 뿌린 뒤 물을 열심히 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모종들이 담긴 포트에 자꾸 시선이 갔다. 하지만, 이렇게 즐길 시간없이 텃밭에서 땀만 흘리고 있다면, 노동의 보람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즐길 때에는 애써서, 그리고 억지로 즐길 필요도 있다. 한두 주, 마음의 여유를 강제하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