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텃밭부터 들어가 고추를 딴다. 해는 점점 짧아지고, 집에 도착하는 저녁 7시 반 언저리 역시 점점 어두워진다. 그 즈음에 최고의 극성을 부리는 풀모기떼를 얼른 피해, 먹을만큼 자란 고추 몇 개만 거두고 얼른 집으로 들어온다. 마당의 라이에게 인사하는 것 역시 잊지 않는다. 거둔 고추 너댓개는 물에 간단히 씻은 후 저녁밥상으로 올라올 것이다.
방금 거둬온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먹기를 좋아한다. 나이가 들면서 매운 고추는 속이 쓰려서 잘 못 먹게 되었지만, 맵지 않은 오이고추나, 약간 매워진 정도의 고추는 즐겨서 먹는다. 아삭한 식감이 입을 시원하게 해 주고, 씹는 순간의 청량감은 기분을 시원하게 해 준다. 그 뒤로 이어지는 알싸함은 때론 부담스럽지만, 한여름 풋고추의 긴 여운을 간직한다. 방금 거둔 고추는 달다. 당이 주는 고유한 달달함은 아니다. 청량과 알싸함 속으로 은근하게 배어있는 단맛이 있다. 그리고, 수분이 가득하다. 청량감에 이어 넘치는 수분과 단맛은 방금 거둔 것들이 아직 충만하게 간직하고 있는 생기다. 나는 이 생기를 즐긴다. 거두는 순간부터 손에 쥔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듯 사라지는 생기를, 최대한 즐기려 노력한다. 여름은, 그리고 가을은 그러한 즐김에 최적인 시기이다. 마트나 시장의 진열대에서 구입해 온 것들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그 싱싱함, 활력.. 나는 지금 내 텃밭이 주는 미각의 정점을 지나는 중이다.
고추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오이가 열리면 바로 껍질을 벗기고 적당한 크기로 썰어서 이 역시 고추장에 찍어 먹는다. 방울 토마토는 빨개지는 순간 풍뎅이나 벌레들이 입을 대기 전에 얼른 거두어 바로 먹는다. 생기와 함께 느끼는 달달함은, 내 텃밭이 아니면 느낄 수 없는 맛이다. 갓 거둔 것들을 가장 순수한 방법으로 즐길 수 있는 방법은 그대로 먹는 것이다. 고추장같은 약간의 양념이 있다면 맛은 더욱 풍성해지지만, 날 것 그대로의 생기가 주는 미각의 정점은 오롯하다. 우리는 맛을 찾으러 다니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정작 순수하고 오롯한 맛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여전히 만나기 어렵다. 노동과 마음씀 끝에 만나는 보람찬 맛과도 조금은 다르다. 이제 막 거둔 것이라는 유일한 조건은, 순수의 의미에서 맛의 정점을 보장한다. 그것을 깨닫는 가장 쉬운 방법은, 직접 길러내는 방법이지 않을까 싶다.
바질은 무더위에 잎이 넓어지기 전에 꽃대부터 올렸다. 싸늘한 봄에 그렇게 무성하던 루꼴라 잎과 순은 더운 여름에 조금 억세어졌다. 한여름 루꼴라는 그래서 먹을만한 잎을 고르는 수고가 필요하다. 덤불이 되어버린 루꼴라 줄기 몇 개를 그대로 꺾은 다음, 그늘로 와서 먹을만한 잎들을 골라 모은다. 물에 한 번 씻은 다음, 넓은 그릇에 두고, 텃밭의 바질 잎을 넉넉히 따서 손으로 찢어 섞는다. 그 위로 발사믹 식초, 올리브 오일, 소금과 후추 약간을 넣은 다음 잘 버무려준다. 그러면 한여름 파티의 훌륭한 에피타이저가 된다.
가지와 호박은 한여름 요리재료의 정점이다. 아내는 가지를 쪄서 가지무침을 잘 만들었다. 그러나, 올해는 둘이 병원일에 매달리다 보니, 집에서 요리할 여유를 가지지 못했다. 그래도, 텃밭에서는 먹을 것들이 넘치는데 그것들을 방치할 수는 없는 일.. 나는 주말에 친구들을 불러두고 미리 가지를 거두었다. 가지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가운데를 홈처럼 칼집을 낸다. 다진 돼지고기와 양파를 섞고, 텃밭의 깻잎을 몇 장 뜯어와 다져서 같이 섞는다. 달걀 하나, 소금과 후추를 뿌리고 잘 섞어 소를 만든 다음, 칼집 낸 가지 안쪽에 전분을 살짝 바르고 소를 적당히 넣어 물린다. 차가운 맥주로 튀김옷을 만든 다음, 가지에 묻혀 튀기면 가지튀김이 완성된다. 고기 소가 남으면, 고추를 반으로 잘라 씨를 제거하고 전분을 묻혀 소를 넣고 튀김옷을 거쳐 튀기면 고추튀김이 된다. 호박은 또 어떤가.. 애호박이라고 하기엔 조금 크게 자란 텃밭 호박은 된장찌개에 종종 들어가지만, 우리가 먹는 방법은 호박전이다. 적당한 두께로 자른 뒤, 간을 한 계란물에 묻혀 팬에 부친다. 가지와 호박에 배인 그 단맛과 미처 증발하지 못한 수분이 갓 거둔 요리재료의 신선함을 그대로 간직한다. 더운 여름이지만, 불에 열심히 요리한 가지와 호박은 훌륭하고 잘 어울리는 맥주안주로 최고다.
제주의 여름은 한치가 빠질 수 없다. 낚시를 하는 친구가 있다면 가끔은 한치를 선물받곤 한다. 회로도 먹지만, 죽은지 시간이 지난 것들은 손질하여 얼려두었다가 나중에 요리로 사용한다. 길게 잘라서 버터두른 팬에 익혀 먹는데, 이 때 양파 조금과 텃밭에서 따온 바질잎을 다져 넣으면 풍미가 살아난다. 어쩌면 딜의 가는 이파리들이나 펜넬 이파리들을 조금 다져 넣으면 잘 어울릴 지도 모르겠다. 아, 펜넬들은 우리 마당에서 잘 퍼지지만 웃자라는 바람에 벌브가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종종 벌브가 굵게 자랄 때가 있는데, 그 땐 고기스튜를 만든다. 돼지 앞다리살이나 뒷다리살 덩어리와 쇠고기 덩어리를 사고, 감자와 양파를 준비한다. 큼직하게 썰어서 큰 냄비에 통째로 넣고, 닭육수와 레드와인을 반반씩 자작하게 넣는다. 소금과 후추를 뿌린 다음, 주먹만한 펜넬벌브를 양파 썰듯이 길게 썰어 넣는다. 그리고 마당에 나무처럼 자라는 로즈마리와, 마당 구석구석을 차지하는 타임을 손질하여 줄기째 넉넉히 넣고 끓인다. 한소끔 끓으면 오븐에 넣고 두 시간.. 부드러운 육질과 향긋한 고기스튜가 완성된다. 날이 선선해지면, 일종의 영양식으로 만들 계획이다.
마당 곳곳의 부추는 미처 거두지를 못했다. 쉬는 날의 여유가 비와 함께라면 아내는 분명히 냉장고의 한치를 꺼내며 나한테 마당의 부추를 잘라오라고 할 것이다. 한치부침개를 먹을 것이고 나는 그 옆에 막걸리를 곁들일 것이다. 헨드릭스 진에는 마당의 오이를 얇게 썰어 잔 가장자리로 붙일 것이다. 모히또에는 애플민트가 쓰일 것이며, 겨울이 완연한 어느날에는 마당과 거실의 노랗게 익은 레몬을 로스트치킨에 넉넉히 활용할 것이다.
겨우 두 개지만 사과가 알이 굵어지고 있다. 포도는 엄청나게 열리더니만 유난히 가물고 맹렬한 볕에 알들이 마르고 병들어 맛도 덜하고 상태도 좋지 않았다. 그래도 몇 송이 거두어 먹을 만한 알을 솎아 먹었다. 무화가가 익어서 대부분이 새들과 풍뎅이, 개미들의 좋은 식사가 되고 있었다. 이제 막 익으려는 것들을 거두어 후숙시켜 나도 맛을 보았다. 조금 덜 달지만 흙맛의 정겨움이 있었다. 노랗게 익은 물외가 초고추장과 참기름에 버무려져 주말 저녁반찬으로 올라왔다. 그러고보니, 요즘 고기를 구워먹고 싶다는 생각이 꽤 오랜 시간 들지 않았다. 날이 더워서도 그렇겠지만, 텃밭과 마당에서 나는 것 만으로도 끼니가 풍성했기 때문이었다. 끼니마다 올라오는 날것의 순수함, 그 생기에 지칠 법도 한 여름입맛이 잘 버티고 있었다. 속이 살짝 쓰려도 매번 생각나는 텃밭 풋고추의 생기가 더위에 속수무책인 나를 지켜주고 있었다. 이런 입맛이라니, 나도 정말 나이가 넉넉하게 쌓였나보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