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텃밭일기 : 8월 1일

by 전영웅

텃밭에 무언가들이 넘치도록 열린다. 각자의 꽃을 피우고는, 시든 꽃잎을 밀어내듯 떨구고 각자의 무언가가 매달려 커지기 시작한다. 맨 먼저 그러한 것은 고추였다. 별처럼 생긴 하얀 꽃이 누렇게 시들면, 꽃잎을 밀어내며 고추가 자라기 시작했다. 뒤를 이은 것은 방울토마토였다. 한 다발의 꽃대에 노란 꽃들이 피어나면, 그 자리에 초록의 물방울같이 생긴 토마토가 점점 커지면서 붉은 덩어리로 변한다. 오이, 호박, 그리고 가지.. 날이 더워지면서 텃밭은 결실의 경쟁터가 되었다.


인간의 관점에서 그런 결실이 있으니 재배라는 행위를 한다. 나 역시 그런 결실에 기대를 가지고 텃밭을 운영한다. 넘쳐나는 벌레들에, 몸을 뜯는 모기들에, 금방이면 텃밭을 뒤덮어버리는 검질관리가 전부라면, 내가 굳이 텃밭에 관심을 가질 리가 없다. 순수한 본능을 관점에 녹여 말하자면, 단 하나의 이유, 결실이다. 그것들을 거두어 먹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간이 식물을 재배하는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유일하고 거대한 이유 앞에서, 노동의 숭고함이나 흙에서의 사고, 사유의 단련따위는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먹고사는 일이 노동하지 않고도 자본의 순환 안에서 해결되는 세상에서의 지적 유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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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더워지기 시작할 무렵에 고추 몇 개와 울퉁불퉁한 애호박 하나를 거둔 것이 시작이었다. 아마 비가 온 뒤 며칠 후였을 것이다. 비예보가 희망고문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던 때, 앞으로의 풍성함을 맘놓고 기대할 수 있었던 결실이었다. 풋고추는 씻어서 그대로 고추장에 찍어먹었고, 애호박은 썰어서 호박전으로 먹었다. 그리고, 텃밭은 가뭄을 맞는다.


비 예보가 몇시간 단위로 계속해서 뒤로 밀리는 나날이 지속되자, 텃밭도 결실맺는 일이 더뎌졌다. 물을 간신히 머금은 오이는 통통하게 굵어지기도 전에 누렇게 익었다. 애호박도 매끈하게 커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울퉁불퉁해졌다. 고추 역시 울퉁불퉁해지면서 굵어지지 못한 채 길이만 늘었다. 생기보다는 버틴다는 기운이 텃밭에 가득할 때, 나는 3-4일에 한 번씩 물을 주며 버티기를 도왔다. 가지와 물외는 버텨달라는 내 물줄기에도 꽃만 피우고는 각자의 것들을 맺지 않았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한라산에 의한 푄 현상으로 덥고 건조했다. 건조한 바람은 모든 것을 멈추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러다 기다리던 비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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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 양은 아니었지만, 손바닥만한 텃밭을 적시기엔 충분했다. 다시 생기가 충만해졌고, 그 기운은 결실로 나타났다. 오이와 호박은 곳곳에 결실을 맺었고, 방울토마토 역시 빨갛게 익어가는 속도가 남달랐다. 가지가 보랏빛 눈물방울을 맺기 시작했고, 고추는 말 할 것 없었다. 유일하게 하나 맺힌 망고수박 한 덩이는 점점 커지면서 껍질 색도 짙어졌다. 나는 수박 아래에 널빤지를 깔아주었다.


텃밭 만이 아니었다. 현관 앞 감나무에는 감꽃이 셀 수 없이 많이 피어, 바람이 불 때마다 후두두 바닥으로 떨어졌다. 작년에도 엄청나게 열리던 포도가 해거름을 포기했는지 올해에도 많이 열렸다. 마치 마술처럼, 잘 보이지도 않던 포도송이들이 밤새 내린 비에 알이 작은 유리구슬 크기로 부풀었다. 그것들이 안방을 가리는 돌담을 넘어 반대편 돌담아래 라이의 집 위까지 늘어졌다. 그 옆의 사과나무는 아쉽고 초라하게도, 단 두개의 사과를 매달고 있었다. 그 사과도, 점점 커지고 있었는데, 밤새 내린 비에 크기가 불쑥 커진 느낌이다.


휴가로 일주일 동안 집을 비웠다. 비가 내리지 않는 날들이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걱정스러웠지만 그런 이유로 휴가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출발하는 날 아침일찍 서울 어른들에게 드릴 것들을 거두어 챙기고는 잠시의 작별을 고했다. 휴가지에서 들리는 소식은 역시나 비 없이 폭염이 이어진다는 소식이었다. 그러다 제주로 복귀하는 때에 맞추어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에, 나는 마음을 살짝 졸이기 시작했지만 태풍영향으로 비가 많이 내린다는 소식은 무척 반가웠다. 도착하면 적어도 안타까운 마음에 어둠속에서 호스를 들고 물을 뿌리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몇 번의 여름 휴가의 마지막이 그러했다. 피곤한 몸으로 어두운 마당으로 호스를 들고 가서, 미친듯이 달려드는 모기떼를 손으로 휘저어 쫓아내며, 잘 보이지 않는 텃밭에 물을 뿌렸었다. 올해의 여름휴가 마무리는 비가 내리는 밤 마당에 도착하여, 라이와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 일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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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자마자 비내리는 마당에 나가보니 텃밭은 생기와 물기로 가득했고, 마당의 검질역시 같은 생기와 발악을 발산하고 있었다. 아내는 텃밭에 들어가 그간 열심히 자란 것들을 거두었다. 다수의 고추와 잘 익은 방울토마토들, 적당히 자란 가지들, 누렇게 익기 시작한 오이들, 그리고 애호박.. 깻잎과 바질도 무성했다. 널빤지를 깔아 준 망고수박은 때가 살짝 지난 듯 했다. 얼른 거두어 속 노란 수박을 맛보았다. 약을 치지도 않고 관리법도 모르니 아무렇게나 자란 녀석은 맛이 덜했다. 오이와 고추는 그대로 고추장에 찍어먹는 맛이 별미였다. 그냥 그대로 즐기는 중이다. 두 사람 모두 병원에 집중하고 있으니, 집에서의 요리는 자제하고 있다. 호박전 정도나 간단히 부쳐먹는 선에서 있는 그대로 간단히 손질해 먹고 있다. 그렇게 먹어도 충분히 맛있고, 소출이 아무리 적어도 한 집 식구 먹는 양으로는 넘친다. 그럼에도 나는, 예전의 그 고집, 내 텃밭에서 직접 키운 것들을 주재료로 요리하겠다는 고집을 온전하게 버리지 못했다. 주말이면 약간의 피로와, 밀린 알콜섭취와, 숙제처럼 이어가는 자전거타기에 바쁘다. 그 사이를 비집고, 내 고집을 제대로 피워 볼 때가 있을까? 그 시간이 길지 않음을 안다. 넉넉하고 풍성한 시기는 사계절의 어느 한 때에 불과하다. 인간이 한 해 동안 먹고살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 본래의 기간과 딱 일치할 것이다. 생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그 시기가 지나면, 생기는 숙성과 저장이라는 과정으로 소모되어야 할 것이다. 생기를 요리하는 것과, 숙성된 것들과 저장된 것들을 요리하는 일은 많이 다르다. 나의 고집은 그 생기를 요리에 담아 표현하는 행위이다.


오늘 휴가를 보낸 뒤의 첫 병원근무를 마치고 퇴근했다. 어제 거둔 오이와 고추가 훌륭한 반찬이 되어주었고, 붉은 방울토마토는 좋은 후식이 되어 주었다.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서재에 앉아 그간의 소원했던 텃밭일기를 적어 내려간다. 가물던 날이 오래 지나 두 개의 태풍이 지나며 비를 쏟더니, 지금은 밤하늘이 개이고 있다. 텃밭만큼 풍성해진 마당의 검질이 눈에 밟히고, 넘치는 텃밭소출에 누구를 줄까 싶은 마음의 넉넉함이 걱정처럼 생긴다. 몸의 노곤함이야 피할 수 없는 일이고, 풍족함은 노곤함을 넘어서 한동안 우리를 즐거운 고민에 빠뜨릴 것이다. 그 고민에 내 고집을 실현시킬 수 있을까.. 개원 첫 해의 여름에 나는 욕심이 여전한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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