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입구에서 텃밭을 정돈했다.
찬바람에 시들기 시작한 고추와 가지를 뽑아냈다. 속이 차기 시작하는 배추는 끈으로 묶어주었다. 누렇게 말라가는 서리태와 메주콩은 뽑아서 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를 펴고 거꾸로 세워두었다. 한 철 내내 작물들이 기대었던 지주대들을 정리해서 집 뒤편에 두었다. 텃밭 한 켠에 남겨 둔 바질 세 그루도 이파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바질을 잘 활용할 것 같은 지인에게 연락해서, 더 시들기 전에 뽑아가라고 했다. 두 주전 고구마를 캐낸 자리에는 양파 모종을 심었었다. 양파 모종들은 뿌리를 내리며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브로콜리 양배추들은 조금 벌레 먹은 채로 나름 잘 자라주고 있었다. 무는 열심히 자라고 있지만, 예전만큼 덩치를 키우지 못하고 있었다. 쪽파는 이미 충분히 먹을 수 있을 만큼 줄기를 곧추세우고 있었다. 고추와 가지를 뽑은 자리에는 무얼 심을까 잠시 고민하다가, 창고에서 완두콩을 꺼내 세 개씩 간격을 두고 심었다. 몇몇 곳엔 싹이 틀까 조금은 의심스러운 그린빈 콩도 심어보았다. 모아둔 고수 씨앗도 있어서, 텃밭 한편에 작게 골을 내주고 심었다. 겨우내 한기 섞인 바람에 고생 좀 하겠지만, 탄탄하게 줄기와 이파리를 낼 것이다. 텃밭 주인으로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심고 물을 주는 일까지다. 그리고 그것으로, 한 해의 텃밭일은 거의 마무리되었다.
주택으로 이사한 후 마당 한 켠에 텃밭을 만들었다. 스무 평 조금 안 되는 공간을 봄이 되면 퇴비를 뿌려 땅을 뒤집고 이랑과 고랑을 만들어 모종을 심고 씨앗을 뿌렸다.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 무더위가 조금 물러날 즈음에는 텃밭 한 켠을 정리해서 무와 배추 등등을 심어 가을 텃밭을 꾸렸다. 이사하기 전에는 이런 일들을 차를 타고 가서 해야 했었다. 텃밭이 마당에 꾸려지니 작물들은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좀 더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텃밭은 좀 더 깊게 일상의 한 부분을 차지했고, 나는 시간이 될 때마다 장화를 신고 텃밭으로 들어가 호미를 놀리고 잡초를 뽑았다. 텃밭은 마당 한편에 꾸려진 나의 놀이터였다.
올해 제주는 가물었다. 가끔씩 비가 내려도 표면만 살짝 적시다 마는 수준으로만 내리고 그쳤다. 작게나마 땅을 다루는 입장에서 비는 근심의 대상이다. 많이 내려도 걱정이고 적게 내려도 걱정이다. 제주 땅은 물이 잘 빠지는 성질이라 비가 많으면 작은 텃밭 하나 관리하는 입장에서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가 적으면 근심이 커진다. 모종을 심어놓았는데 비가 오지 않으면, 아침저녁으로 호스를 끌어다 물을 주느라 분주해진다. 땅이 너무 마르지 않는지, 심어놓은 작물들이 시들지 않는지 자주 시선을 줄 수밖에 없다. 올해는 유독 그러했다. 너무 가물어서 호스로 물을 대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작물들도 가뭄을 느끼는지 제대로 자라주지 않았다. 고추는 말라서 제대로 열리지도 않았고, 열린 것들도 제대로 자라지 못해 크기들이 작고 금방 빨갛게 익어버렸다. 가지도 많이 열리기는 했지만 제대로 자라지 못하다가 벌레 먹거나 병에 걸리곤 했다. 호박 역시 마른땅에 줄기만 열심히 뻗다가 애호박 두세 개 맺고는 그만이었다. 충분하게 내려주는 비 한 두 번이 사람에게나 작물들에게나 절실한 한 해였다.
작게나마 작물들을 키워 본 사람들은 안다.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정성스레 물을 주어도, 하늘에서 충분히 내려주는 비 한 두 번만 못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심어 놓은 모종이 자리를 잡고 한창 키를 키우는 5, 6월에 비 한번 충분히 내리고 나면, 작물들의 키가 눈에 띄게 커지고 생기가 돋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주인이 물을 줄 때와 똑같이 땅은 젖어도, 작물들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것이다. 그 이유가 정말 궁금했다. 리듬감 있고 적당한 힘으로 이파리에 부딪히는 빗방울에 자극을 받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고, 천천히 충분하게 젖어들어가는 땅의 수분이 작물들을 키우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그렇게 비 한번 오고 나면, 인간의 힘이란 자연 앞에서 얼마나 초라한 수준인지 알게 되고, 주인이 주는 물보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더 잘 자라 주는 작물들에 묘한 배신을 느끼기도 하는 것이다.
보통 가을 텃밭은 애써 물을 주지 않아도 된다. 모종을 심거나 파종한 늦여름 끝자락의 무더위에만 땅이 마르지 않게 잠깐 신경 써주면 작물들은 알아서 싹을 틔우고 이파리를 키운다. 그러나 올해는 날이 쌀쌀해지도록 신경을 써야만 했다. 비는 내리지 않았고, 새벽 찬 공기에 응결된 이슬이나 습기는 충분치 않았다. 물을 종종 뿌려줘야 했고, 한 해 텃밭의 마지막 작업을 정리하면서도 완두가 싹을 틔우는데 땅이 너무 마르지 않았나 자주 살펴야 했다. 날은 점점 추워지고 바람은 거세어지는데, 구름이 날리는 맑은 하늘이 왠지 살짝 원망스러운 요즘이다.
작년까지는 초겨울에 무와 배추를 뽑고 나면 겨우내 땅을 거의 놀렸었다. 올해엔 작물들의 성장과 수확시기를 고려해서 일 년 내내 다양하게 길러보기로 했다. 그래서 겨울의 시작점에 한창 자라야 할 양파와 양배추와 브로콜리, 쪽파가 텃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가물어서 신경이 조금 쓰이기는 하지만, 무리 없이 잘 자라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봄이 되면 적당한 시기에 수확하면서, 빈자리마다 봄 텃밭 모종들을 심을 것이다. 나의 놀이터는 이렇게 사시사철 풍성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