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연하게라는 표현이 맞을까.. 방치의 시간이었다.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주변으로 일이 많기도 했거니와, 해가 짧아지니 텃밭을 바라볼 시간도 함께 짧아졌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 과도기의 빈곤함이 나를 허전하게 해서였을지 모르겠다. 넘치던 여름은 강렬한 태풍을 맞고 급격하게 빈곤해졌다. 그것은 가을을 준비하라는 신호이기도 했지만, 입이 즐거웠던 시절의 종료를 알리는 신호이기도 했다.
또 하나의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소식에 묶어두었던 유칼립투스와 모과나무를 그대로 두었다.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올라오는 무 싹을 1차로 대강 솎아주고 흙을 북돋워 주었다. 그것이 지난 2주간 텃밭에 손을 댄 유일한 작업이었다. 더욱 강력하다는 태풍은 다행히 제주를 많이 비껴나 지나갔고, 아무런 영향없이 일상도 텃밭도 무사했다. 그래서인지 나의 무관심은 더욱 당연해져서, 출퇴근과 마당의 라이녀석에게만 신경쓰는 날들이 이어졌다.
알아서 자랄 것들이었다. 쪽파는 그러했고, 무는 두어 차례 솎아서 간격만 확보해주면 알아서 뿌리를 굵힐 것이다. 그러고는 겨울 내내 방치할 것이다. 필요할 때 뽑아서 먹으면 될 일이고, 농어를 잡아 매운탕을 끓일 일이 생기면 그 때 또 뽑아 먹으면 될 일이다. 비료만 좀 더 주면 된다. 생각에는 양분이 넉넉한 땅 같은데 꼭 그러한 것 같지는 않아서 비료를 챙겨줘야 한다. 어느 시기에 주면 되는 지도 잘 모른다. 무를 한 번 더 솎고 나면 흙을 북돋우고 줄 생각이다. 가을 텃밭은 이렇게, 무질서하지만 간단히 서술할 수 있을 정도의 간략한 작업으로 정리가 가능하다. 열심히 매 줘야 할 검질도 없고, 뙤약볕과 풀모기 걱정에 차림을 따질 필요도 없다. 빈곤한 시기지만, 텃밭에서 뭔가를 꺼내어 먹는다는 보람은 여전히 이어진다.
방금 딴 고추의 청량감과 아삭함을 이제는 즐기지 못한다. 태풍에 넘어져버린 고추들은 거의 다 정리되고 몇 그루만 억지로 세워두었다. 태풍을 겪은 고추들은 색이 짙어지고 억세졌다. 청량감은 조금 있지만 질겨져서, 아삭함은 사라졌다. 억세지고 색이 짙어진 고추들은 괜히 매울까봐 손도 잘 가지 않는다. 게다가 짧아진 해에, 퇴근을 하면 이미 어두워져서 고추가 보이질 않는다. 질기고 억세어진 채로, 짙었던 고추색은 그대로 붉게 익어버린다. 그래도 방금 딴 고추의 생기가 그리워 거두어보려 하지만, 퇴근 후 어두워진 마당은 그런 욕구마저 망각하게 만든다.
가지도 마찬가지다. 바람을 타버린 가지들은 껍질이 거칠고 두터워진다. 일부러 세우고 지지대를 다시 대 주었지만, 바람에 타버린 잎들은 생기를 되찾지 못하고, 매달렸던 작은 가지들은 찬 바람에 잘 커지지 않는다. 생생함을 조금 잃어버린 가지들을 거두어 요리를 했다. 크지 않은 녀석들을 반으로 칼집을 내고, 다진 돼지고기와 양파 토마토 등을 볶아 속을 채워서 오븐에서 익혔다. 간을 잘못 잡은 이유도 있었지만, 두터워진 껍질은 익어서 부드러운 가지 특유의 식감을 방해했다. 고추도 가지도, 태풍이 모두 지나가고 선선해진 지금, 곁가지에서 새순을 내고 있다. 서늘해진 날씨에 오로지 한낮의 반짝이는 햇살에 의지하여 번식의 욕구를 내비칠 것이다. 얼마나 더 열리고 얼마나 먹음직스럽게 커질 것인지는 모르겠다. 정말 아쉬운 건, 청량하고 아삭거리는 식감과, 넘치는 육즙과 부드러움을 즐길 시기는 이미 지났다는 사실이다. 마치 바다에 뛰어들기엔 조금 힘들어진 철지난 여름바다의 아쉬움처럼, 텃밭의 먹거리들도 물오른 시기는 지났다.
지난 태풍에 넘어졌던 무화과는 가지를 짧게 쳐서 그늘 밖으로 나오는 가지가 없음에도, 그늘 안에서 다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뿌리가 부실해져서 걱정이었던 살구나무는 다행히 남은 줄기와 잎들이 시들지 않고 있었다. 피해가 하나 더 생겼는데, 텃밭 가장자리의 단풍나무가 아무래도 죽은 듯 하다. 잎들이 다 말라서 떨어져버렸다. 좀 더 기다려보고 정말 죽은 것이라면, 다시 나무 하나를 들일 생각이다.
태풍이 지나는 시간의 무기력한 기다림이 신을 갈구하는 종교의 시간이라면, 태풍이 지나고 몸을 움직여 수습해야 하는 시간은 이성의 시간이다. 인간의 욕심을 자연이라는 무한의 존재가 휩쓸어버리고 나면, 인간은 다시 쓰러진 욕망의 기둥을 세워 본능에 기초한 생존을 도모한다. 우매하면서도 숭고한 생존본능 행위의 반복이다. 생존을 위한 반복이건만, 나는 빈곤함을 여유롭게 그리고 유유자적하게 바라본다. 걱정은 없다. 텃밭이 빈곤하다고 해서 내가 당장 굶을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가 태풍의 위력을 무섭게 키웠다. 태풍이 지나가는 시간은 그래서 무한자에의 갈구가 더욱 간절해졌다. 그럼에도 나는 내 앞에 당장 닥친 빈곤함을 걱정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한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일인가, 또는 인간 이성의 상대적 승리를 의미하는 일인가. 이런 생각과 논리는 오만함인가?
심기 무섭게 솟아나는 무 싹들과, 한동안 자리를 잡더니 넓어지는 상추들이 보였다. 촘촘히 심은 쪽파도 며칠 지나지 않아 뾰족한 푸른 줄기들을 흙 밖으로 낸다. 밟으면 그대로 으스러질 저 존재들이 무한자의 공간 안에서 순리대로 살아간다. 또는 자연 안에서 그저 제 힘을 다해 살아간다. 연약하지만 인간이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존재들이다. 당장에 고픈 배를 이제 막 솟는 싹들로 채우지 않아도 가능한 삶을 나는 살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시스템이 자연한 시스템보다 더 우월하기 때문인가? 그런데, 기후위기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는 인간의 시스템이 불안해짐을 느끼고, 그로 인해 생존의 위기를 느낀다. 자연함 안에서 알아서 자라는 것들은 그대로인데, 인간의 시스템은 그대로인 것들을 그저 그대로 취하지 못하게 한다. 집 근처 마트 신선코너에 쌓인 상추는 그대로인데, 가격표는 100그램당 1400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당장 내 배가 고플 일 없게 해 주는 인간의 시스템은 무한자의 존재를 무시해도 좋을 만큼, 또는 자연함을 뛰어넘는 우월한 시스템일까? 매년 이 시즌의 반복되는 빈곤함은, 쓸모유무를 잘 모르겠는 의문과 고민을 만들어낸다. 몸이 편해지니 쓸데없는 생각만 많아지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