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텃밭일기 : 10월 28일

by 전영웅

가을이 한창임에도 날은 가물어 있다. 갑자기 추위가 찾아왔다가 다시 날이 온화해지는 반복이 몇 번 있었지만, 그런 급격한 온도변화에도 비는 내리지 않았다. 잠깐의 위안같은 이슬이 서너 번 내렸을 뿐이었다. 이슬이 내려 텃밭흙이 약간 짙은색으로 젖는 것도 잠시 뿐이었다. 한낮의 따가운 가을볕과 서늘하지만 건조한 바람은 그마저도 서둘러 말려버렸다. 물기를 잃은 흙은 덩어리로 뭉쳐, 호미로 치니 퍼석이며 흙먼지를 날렸다.


무언가에 홀린듯 멍한 요즘의 내 정신상태도 텃밭의 가뭄에 한 몫 했다. 일상은 그대로 흘러가고 있다. 병원은 동네의원으로서의 기능을 착실하게 실행하며 안착 중에 있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출퇴근도 여전하다. 검도장에 출석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일상은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머리는 마치 딴생각에 빠진듯 수시로 멍해진다. 그 멍함이, 아침 출근 전 마당의 라이녀석을 챙겨주고 난 후의 잠시동안, 텃밭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게 한다. 메마른 텃밭을 바라보며 나는 멍한 상태로 있다가 등교하는 아들녀석이 현관문을 열면 그제야 차로 다가선다. 메마른 텃밭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잠깐사이에 부족하더라도 물을 좀 뿌려준다면 텃밭에 도움이 될 것이건만, 나는 무슨 생각에 빠져 물을 줄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정해진 일상 외의 변수같은 자잘한 생각들이 내 머리를 복잡하고 혼란하게 만든다. 여튼,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왜 물을 주지 않고 있는 거지? 시들지는 않았어도 성장에 분명한 문제를 보이고 있는 무와 쪽파들이었다. 물이라도 좀 주었다면 좀 더 나은 모습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마당 호스를 들고 출근 전 잠깐 물을 뿌려주기 시작했다. 며칠 전 부터의 일이었다. 나는 이제 호스를 들고 물을 뿌리며, 멍하니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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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구하는 사상과 내가 속한 현실의 괴리는 날 힘들게 한다. 솔직하자면, 나의 멍한 상태의 대략적이고 중심적인 원인은 그 괴리에 있다. 한가지 더 고백하자면, 아직도 잘 꺼지지 않는 호기로운 욕망에서도 기인한다. 사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잘 버텨왔다. 나는 어찌되었든, 현실에 좀 더 발을 깊숙이 집어넣었으니 포기와 적응의 과정이 필요함을 깨달으며 지내왔다. 그런데, 추구하는 사상이 좀 더 엄격함을 요구하고, 엄격함을 겸비하지 못하면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위치에서 겉멋정도의 허영에서 멈추고 말 것이라는 경고를 날렸다. 욕망은 현실과 타협한 만큼에 비례하여 커지더니, 일상 바깥의 적지않은 공간에서 나를 둘러싸고는 곳곳에서 작은 스파크를 튀겼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한 내 삶을 크게 이분해서, 어느 한 쪽을 포기하지 않으면 내 마음의 평화는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는 요즘이다. 이전에는 마음의 평화를 위해 텃밭에 들어섰었다. 지금은 텃밭마저도 생각을 환기시키지 못하고 멍한 상태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대상이 되어간다.


현실은 무섭도록 크고 무겁다. 몰려드는 환자들과 업무에 정신없다가도, 짬이 나면 나는 활자를 찾았다. 세상 모든 사랑의 모습과 방식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읽었고, 소크라테스 시대에서 근대까지 이어지는 정치사의 한 단락을 펼쳐들었다. 허울좋은 세상의 정치경제와 사상너머 좀 더 진보적인 세상의 이야기를 사이트에서 찾아 읽었다. 요즘은 이 마저도 어렵다. 사랑에 관한 철학은 겨우 책장은 넘기고 있고, 진료실 책상 구석의 정치사 책표지에는 먼지가 쌓이기 시작했다. 화면의 진보적인 이야기들은 두어 단락 읽다보면 일이 쌓이기 시작한다. 현실적으로는 아주 좋은 현상이지만, 나의 여유와 마음은 좁아진다. 좁아진 마음의 걍팍함이 집마당의 텃밭으로도 해소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쌓여만 가는 괴리의 괴로움과 걍팍의 답답함을 감정적으로 주변에 쏟아내는 얄팍한 그릇같은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 욕망은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자전거를 타고 산이라도 올라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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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텃밭은 정말 메말라 있었다. 잠깐의 물뿌림같은 건 의미가 없어보일 정도로 건조하고 메마른 나날이었다. 목요일 오후 이른 퇴근 후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장화를 신고 호미를 들고 텃밭으로 들어섰다. 미리 사 둔 쪽파를 빈자리마다 심어 자리를 채웠다. 쪽파를 심었던 자리인데, 굼벵이에 먹힌 것인지 가뭄에 말라죽은 것인지 싹이 나지 않은 자리들이었다. 호미질을 할 때마다 흙덩이는 퍼석거리며 깨졌고, 흙은 마른모래처럼 버석였다. 흙먼지가 날려 코를 간지럽게 했다. 가지는 남김없이 뽑아버렸다. 고추도 다 뽑을까 했는데, 아직 초록의 고추를 맺고 있었다. 고추는 질기기는 해도 달고 아삭했다. 여름고추의 맛이 생각나 미련을 담아 더 놓아두기로 했다. 날이 더 추워지면 알아서 생장을 멈출 것이다. 물을 넉넉하게 주었다. 잠시 생각하기를 멈추고 텃밭에 집중했다. 한자리에 서서 텃밭 골고루 물을 뿌리며, 생각보다 가을텃밭에 손보아야 할 일이 많이 남았음을 실감했다. 올해는 가을가뭄이 심해서 더욱 그러했다. 충분히 주었을까 싶을 때, 마당의 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하나 다니며 밑둥에 물을 뿌렸다. 마당으로 호스를 옮기고 물을 뿌리니, 물을 싫어하는 라이가 제 집옆 구석으로 꼬리를 내리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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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아진 해가 기울고 마당은 그늘에 완전히 가려졌다. 마당을 돌아 다시 텃밭으로 들어가 물을 더 뿌려주었다. 마무리를 하려니 멈추었던 생각들이 다시 머리 속으로 파고들었다. 잠시의 휴식을 보내고, 나는 다시 답없는 생각들을 인생의 숙제처럼 이고 살아야 할 것이다. 예상컨대, 머리 속에 가득 담은 생각들로 내가 통제되지 않는 행동으로 분출할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여유없는 머리속과 익숙한 루틴의 삶을 이어가며 혼자 심각한 상태로 지낼 것이다. 어쩌면, 꼰대가 되기 쉬운 대한민국 의사의 삶과는 차이가 있어 다행인 일인지 모른다. 매너리즘의 그 위험 속에서 잠깐의 숨을 위해 수면으로 오르는 고래처럼, 제정신으로 살기 위한 내 사고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텃밭은 그런 내 몸부림에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잠깐의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는데 도움을 주는 여전한 대상으로 존재할까? 조금은 두려움이 생기는 요즈음이다. 마당의 호스를 정리하려고 돌아서는데, 마당과 텃밭의 경계에 선 레몬나무에 레몬 꽃봉오리가 여럿 달렸고, 그 중 하나는 꽃이 만개해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기는 나나 레몬이나 마찬가지였고,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 역시 나나 레몬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러고보니, 텃밭 한 구석에 토마토가 싹을 내서 자라고 있었다. 이 시기에 말이다. 텃밭도 주인을 닮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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