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를 캤다. 캔 시기가 10월 말 이었다. 이전에는 11월에 접어들어 캤는데, 올해는 조금 서둘러 보았다. 고구마가 썩거나 굼벵이 피해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구마 품종마다의 수확적기나 환경영향이나 굼벵이 피해가 다르다는 느낌도 있었다. 내가 모종을 구입하는 집은 고구마 모종을 해남에서 들여왔다. 고구마도 품종이 다양해서 일반 고구마인 밤고구마, 약간 질고 단맛이 있는 꿀고구마, 그리고 그 중간 어디쯤의 맛인 호박고구마 등등이 있었다. 모종을 파는 집은 해마다 그런 품종들을 다양하게 들였다. 제주에서 보통 재배하는 품종은 밤고구마 종류였다. 내 호기심은 단순한 밤고구마를 넘어서서, 해마다 다른 품종들을 심었었다. 그리고, 결과는 실패였다. 근 2-3년을 그렇게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토양이 별로라 그런지 맛이 없거나, 수확이 늦어서인지 고구마가 썩거나 했다. 그리고 열리는 양도 적었다. 무더위가 시작되는 6월의 어느날 모종집을 가서 고구마 모종을 보는데, 마음을 내려놓아야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리고, 제주에서 주로 많이 키우는 밤고구마 모종을 사서 집으로 와 심었다.
자전거로 해안도로를 달리고 난 일요일 오후, 나는 날이 넓은 호미를 들고 고구마 밭으로 들어섰다. 오후 햇살은 이미 정점을 지나 서늘함을 안고 그늘을 길게 만들고 있었다. 고구마 덤불을 한아름 안아 한 쪽으로 던져두고 줄기 밑둥을 찾았다. 그리고는 쪼그리고 앉아 주변을 호미로 조심스럽게 긁어나갔다. 호미날에 바스러진 흙 사이로 고구마 둥치가 보였다. 주변을 조심스럽게 훑듯 호미질을 하니 굵은 고구마들이 몸을 모으고 있었다. 호미로 주변을 정리하고 손으로 달래듯 고구마를 잡고 조심스럽게 뽑으니 굵기와 크기가 상당했다. 크기가 주먹만한 것부터, 조금 과장해서 피구공만한 크기까지 다양하게 뽑혀나왔다.
덤불을 한 쪽으로 거두고, 밑둥을 찾아 주변을 조심스럽게 캐고, 손으로 달래듯 고구마 덩어리를 섬세하게 뽑는 일의 반복이었다. 옆으로 넘겨 뭉쳐진 고구마 줄기는 서로 엉켜 덤불 덩어리가 되었고, 캐낸 고구마들은 내 뒤의 흙밭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작은 고구마부터 엄청난 크기의 고구마까지.. 크기가 보통의 것은 적은데 크고 작기가 천차만별이라 이걸 판다고 생각하면, 상품성이 거의 없어 흉작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키운 고구마는 우리 가족이 먹을 것들이었다. 모양이 울퉁불퉁하고 크기가 제각각인 것은 별 문제되지 않았다. 한 시간 남짓의 서두른 작업 끝에 고구마 수확은 끝이 났고, 나는 근 몇년 사이 가장 수확이 좋은 올해의 고구마밭에 만족을 하고 있었다. 흙 위로 나뒹구는 고구마들을 아내가 소쿠리에 담아 볕이 드는 포장 바닥에 부렸다. 며칠 햇볕에 말린 뒤, 안으로 들여 삶거나 구워먹을 생각이다.
고구마를 다 캐고, 뭉친 덤불을 한 쪽으로 치운 밭은 공간이 꽤 넓었다. 흙을 편평하게 고른 다음, 잠시 고민을 했다. 이 자리는 해마다 봄이면 캐모마일이 불쑥 자라 뭘 심어도 작물을 점령하고 말 것이다. 흙은 캐모마일 씨앗과 흙의 뒤범벅인 셈이었다. 그러니, 무언가를 심는 것이 마땅할까 싶은 찰나에, 친구가 써 보라고 건넨 멀칭비닐이 생각이 났다. 그냥 검은 비닐이 아니고, 가로세로로 직조되어서 통풍과 수분흡수가 가능하다는 벌칭비닐이었다. 생각을 해 내자마자 창고에서 비닐을 꺼내 밭에 넓이를 재고, 비닐을 길게 펴서 모서리 주변의 흙을 판 다음 비닐을 묻었다. 멀칭비닐을 깔고 나니, 캐모마일에의 두려움이 사라졌고 나는 좋아하는 완두를 심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적당한 간격으로 구멍을 내고 완두를 심으면, 봄에 캐모마일에 파묻혀서 시들어버리는 안타까운 모습은 면할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가 생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멀칭한 밭을 본 한 친구가 말했다. ‘멀칭했다길래 난 양파를 심을 줄 알았지.’. 아, 그래, 양파가 있었지.. 나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급한 작업은 아니었으니, 며칠을 완두를 심을까 양파를 심을까 고민했다. 완두도 좋지만, 양파도 꽤 매력있는 작물이었다. 그래서, 몇 해전 실패했던 경험이 있는 양파를 다시 심어보기로 다짐하고 양파모종을 구입했다. 겨우내 먹을 상추도 함께 구입해서 멀칭한 공간 옆 한 이랑에 상추도 심었다. 양파는, 멀칭비닐에 약간 촘촘한 간격으로 작게 구멍을 내고, 가는 모종 하나하나를 심어 공간을 채웠다. 하얀 양파와 적색 양파 2대 1 비율로 심었다. 완두에의 미련도 남아서, 길게 두 줄 정도는 공간을 넉넉히 두고 완두 심을 구멍을 만들었다. 오래도록 메마른 날들이라, 골갱이가 닿는 흙들은 바스라지며 흙먼지를 올렸다. 작업을 마치고 물을 넉넉히 주었다.
올해 고구마는 수확량도 맛도 모두 훌륭했다. 이제까지 해 온 고구마 농사 중 가장 잘 된 해였다. 고기를 구울 때 얇게 썰어 그릴에 올리니 단맛이 풍성했다. 적당한 크기의 고구마들은 삶은 다음, 검도장에 가야하는 날의 간단한 저녁이 되고 있다. 아주 작고 가는 자투리들은 삶은 뒤 바짝 말려서 라이 녀석의 간식으로 활용하고 있다. 입이 워낙 짧은 녀석이라 몇 년 전 같은 방법으로 간식을 만들어 주었을 때에는 입도 대지 않았는데, 올해 고구마는 맛이 괜찮은지 입에 넣고 몇 번은 씹는 시늉이라도 하고 있다. 그게 어디냐 싶게 감사한 마음이다. 양파는 얼마나 잘 자라줄 지 알 수는 없지만, 심은 모종들이 시들지 않고 자리를 잡는 모양새다. 상추는 겨우내 잘 버텨주기만 해도 감사할 것 같고, 텃밭의 빈자리를 채워 심은 쪽파들이 싹을 내는 모양새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 메마른 날들이 너무 오래되니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텃밭풍경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나는 요즘 아침마다 짬이 나는 대로 텃밭에 물을 조금이라도 주고 출근한다. 이처럼 비를 기다려 본 가을이 있을까 싶지만, 올해같이 고구마가 잘 되고, 가을 모종에 기대가 가던 해가 있었나 싶어, 아쉬움을 노력으로 채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