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텃밭일기 : 12월 15일

by 전영웅

텃밭의 무를 먹었다. 장모님이 하나 뽑아 오징어조림에 쓰시고, 장인어른이 고등어조림에 쓰셨다. 조금 남은 무는 무채나물을 했다. 무는 달고 부드러웠다. 올해 무는 예년보다 좀 더 크고 좀 더 빨리 자랐다. 가장 큰 녀석을 뽑았더니, 무 하나로 두세 가지 반찬을 만들 수 있었다. 겨울 텃밭의 유일한 낙이다. 문제는 내가 아직 농어를 잡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잡은 농어 머리와 뼈에 텃밭의 무를 넣고 매운탕을 끓여야 하는데, 올해는 아직이다. 겨우 시간을 낸 두 번의 출조 모두 허탕이었다. 겨울 텃밭의 보람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집 주변의 밭들은 겨울 시즌에 맞게 분주했다. 두어 밭은 바짝 마른 콩을 타작해서 모으고 잔가지와 쭉정이들을 모아 불을 붙였다. 집 옆으로 바로 붙은 밭은 수확을 포기했는지, 어느날 트랙터가 들어와 밭을 갈아버렸다. 하나 건너 밭에는 브로콜리가 부쩍 자라서 꽃다발을 맺기 직전이다. 멀리서 콜라비 농사를 하는 지인은 가을과 겨울의 가뭄을 걱정하면서, 하루하루 당도가 오르고 있는 콜라비의 맛을 가늠하고 있었다. 동네는 쪽파와 부추가 유명하다. 집 아래 언덕을 오르면 밑둥 잘린 부추와 바람에 이파리 뭉치가 흔들리는 부추가 반반인 밭이 있다. 그 옆으로는 멀칭해서 심은 쪽파가 구멍마다 길쭉하게 솟아 있었다. 좀 더 올라 시내쪽으로 가면 바람을 그대로 맞는 언덕배기 밭에 우리집보다 늦게 심은 양파 모종이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도 줄기를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산책을 나온 라이는 양파밭 입구 한쪽에서 뒷발 하나를 들고 예의 영역표시를 하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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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분주한 풍경 속에서 내 텃밭만 고요하게 지나는 듯 했다. 손을 대지 않으니, 심겨진 것들은 때를 만나 무성히 싹을 올리는 잡초들과 조용히 다투면서 제 몸집을 불리고 늘리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저 바라만 보았다. 겨울 가뭄이라지만 날이 추우니 땅의 수분은 마르지 않아 작물들이 시들지 않을 정도였다. 새벽의 이슬과 간간히 뿌리는 부슬비 그리고 잠깐의 빗방울이 손바닥만한 텃밭에 아쉽지 않게 물기를 머금게 했다. 무성하지만 자잘한 잡초의 싹들을 당장은 어쩌지 못한다. 겨울의 혹독한 바람과 가끔의 눈에 몸을 사렸다가 봄이 되면 순식간에 부풀어버릴 녀석들의 앞날을 두려워할 뿐이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은 없는 것이다. 겨울이 추운 이유는 사람의 손을 쉬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고 보면, 제주의 어설픈 추위는 사람을 제대로 쉬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주변의 밭들이 온통 푸르다. 밭에서 사람은 움직여야 하는데, 나름 겨울이라고 몸은 어쩔 수 없이 번거롭다. 나의 할 일 없음은 내 스스로 강제하는 셈이다. 일이라곤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쉼에의 핑계를 만드는 일이 전부인 것이다.


사람이 쉬거나 쉬지 않고 일하건 간에, 육지에 비해 겨울이 어설픈 제주의 땅에서는 먹거리 장만이 가능하다. 조금만 더 있으면 콜라비와 브로콜리가 밥상에 오를 것이고, 무는 지금부터도 언제든 먹을 수 있다. 땅에 심은 것들이 겨울을 날 수 있기에, 온전히 겨울을 보낸 것들은 보약이라는 별칭을 부여받는다. 무가 그렇고 쪽파가 그렇다. 월동 양파는 오래도록 저장이 가능해진다. 그러기에 제주에 사는 사람들은 밭에서 노동을 한다. 쉴 수 있는 사람은 나 같은 텃밭취미 생활자 정도이다. 하루하루 당도를 보아가며 콜라비 수확날을 고대하는 지인에게 쉬라고 말하는 것은 무례에 가깝다. 그러니, 출근 전 아침마다 텃밭을 바라보는 나의 입술은 굳게 닫혀 있다. 먹거리 수확이 가능한 겨울의 제주는 축복일 수 있지만, 쉬지 못하고 노동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한편으로는 고난일 수 있다. 나는 그 딜레마에서 자유로운 입장이어서, 쉼의 핑계들을 나열해가며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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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추위가 닥쳐왔고, 이번 겨울의 첫 눈이 내렸다. 병원이 있는 봉개지역은 중산간에 가까워서 저녁이 되자 눈이 좀 쌓였지만, 바다에 가까운 집은 진눈깨비만 내리다 말았다 한다. 추위는 하루 지나 바로 풀려서, 쌓인 눈이 얼거나 하지는 않았다. 텃밭엔 가뭄에 반가운 물기를 품었을 뿐이었다. 추위가 풀리고 바람이 잦아든 오후의 볕 아래서, 멀칭한 밭에 줄기를 바짝 세운 양파들을 살폈다. 사이사이 심은 완두싹을 솎아주고, 귤나무에 주홍으로 매달린 귤들을 모두 따 주었다. 철모르고 가을싹을 내 버린 토마토들이 노란 꽃을 몇 개 피우다가 겨울바람에 주춤하고 흔들렸다. 구석에서 혼자 살아남은 배추가 이파리를 서로 겹치며 두터워졌다. 그 주변을 하얀 무가 에워싸며 존재감을 발산했다. 잡초 싹들보다 조금 더 자란듯 싶은 쪽파들은 여전히 성장이 더디다. 그러다 봄이 되면 조금 더 자란 채로 보약의 칭호를 받을 것이다. 텃밭 위를 오가는 참새들과 이따금의 직박구리들에 라이가 흥분하여 목줄을 채며 허리를 세웠다. 겨울 오후의 해가 살짝 기울며 그림자가 길어지는 시간이 빨라졌다. 텃밭에 들어가 잠깐의 할 일을 하고 나와서, 라이에게 리드줄을 채우고 오후산책을 나갔다. 굳이 말을 할 필요도 없었지만, 텃밭에 들어가서 나오는 동안의 내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내가 내 일상을 살아가듯, 텃밭도 그들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입을 열지 않음으로 노동에의 예의를 표할 수 있고, 나와 텃밭 각자에게 쿨해질 수 있는 시간, 겨울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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