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텃밭일기 : 12월 23일

by 전영웅

눈이 내렸다. 제주답게 눈은 바람따라 옆으로 날렸다. 바람에 날리다 겨우 땅에 닿은 눈송이는 다시 바람에 날려 구르다가 검은 돌 옆구리에 박히듯 자리잡았다. 검은 돌담에 그렇게 자리잡은 하얀 눈송이들이 모여 눈묻은 풍경이 연출되었다. 날이 추워 녹지도 않았고, 바람에 날려도 눈이 계속 내리니 묻은 눈은 결국 쌓인 눈이 되었다. 한겨울에도 몇 번 없을 쌓인 눈이 텃밭에서도 연출되었다. 나는 그 풍경을 눈바람 속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차를 몰아 출근했다.


올해 눈쌓임은 조금 일찍 시작되었다. 한겨울에 눈이 쌓이는 풍경은 서너번 만들어졌지만 거의가 1월 중순 이후에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올해는 12월 하순부터 였다. 북극의 찬공기가 남하하여 그렇다는 설명을 듣고나니, 기후변화의 한 현상인가 싶기도 했다. 기후변화가 원인이든, 아니면 삼한사온같은 주기적인 기상현상이 원인이든, 나는 세상 안에서 해오고 해야 하는 일들을 하며 살아갈 뿐이다. 무심하게 디젤연료를 태워가며 차를 몰고, 폭설 속에 옆으로 미끄러져 버려진 차들을 지나며 윈터타이어를 일찍 교체한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 반복되는 일상을 유지하려 버둥대는 것이 당연한 거라 생각하듯, 텃밭도 이 추위를 이겨내고 봄의 보약들을 키워낼 것이라 당연히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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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함은 당연한 것일까 종종 생각한다. 폭설이 내리는 날 눈이 쌓여 위험한 길을 뚫고 운전해서 출근을 하는 일은 정말 당연한 일일까. 그렇게 겨우 출근을 하여 진료실에 앉아 있으면, 창문 아래로 눈길을 오가는 차들과 사람들이 보인다. 문득 무엇을 위해 이렇게 움직여야 하는가. 조금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는 어떤 당위가 존재하는가. 쏟아지는 눈과 움직이는 차들의 만드는 풍경에는 어떤 껄끄러움이 배어난다. 혹독한 자연 안에서도 움직여야 하는 인간의 고난함과, 혹독한 자연을 이겨내고 움직인다는 인간의 위대함이 교차한다. 어느 것에 무게를 두고 생각해야 한다는 규정이나 인식은 없다. 다만, 나는 인간의 고난함을 먼저 떠올리고 생각한다. 인간의 고난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먼저 떠올린다. 당연함이 당연하려면, 우리는 이 의문에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제시해야 한다.


폭설에 뒤덮인 텃밭은 자체로 당연하다. 텃밭은, 그리고 텃밭에 뿌리내린 것들은 자연의 일부이기에 자연하다. 자연의 일부이지만 자연을 거스르는 인간과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스스로 눈과 추위를 견디다 병들거나 죽기도 한다. 텃밭에 뿌리내린 것들 뿐만 아니라, 흙 속의 벌레들도 자연한 추위를 견디어 내는 것들만 내년의 봄기운을 느낄 수 있다. 당연함은 존재의 당위마저도 별 것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혹독함이다. 인간의 위대함은 이 혹독함을 이겨내고 존재의 당위를 좀 더 농밀하게 만들었다는 데 있다. 그러나, 혹독함을 이겨낸 결실은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당연함이 당연한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이유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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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은 그렇게 당연함을 바탕으로 결실을 내 주었다. 봄의 노동이 여름의 생기와 결실로 이어지고, 가을의 풍성함과 겨울의 휴식으로 마무리되었다. 거스를 수 조차 없는 자연에 순응하는 당연함으로, 텃밭은 지금 눈바람 속에 얼어붙어 있다. 추위가 오래되면 무는 바람이 들어 맛이 떨어질 것이다. 쪽파는 잎 끄트머리가 말라 쪼그라들 것이고, 완두는 바람에 줄기가 쓸려 말라죽을 지 모른다. 양파는 양파대로 줄기를 눕히고 겨울을 견뎌낼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의 고난을 겪고 봄이 되면, 살아남은 녀석들은 덩치를 조금 키우다가 꽃대를 세우거나 꽃망울을 맺을 것이다. 그 전에 내 손에 거두어져 손질되고 식탁에 오를 것이다. 한겨울 고난을 당연하게 받아들여 나는 손 하나 대지 않고 온전히 쉬는 겨울을 보낸 뒤일 것이다. 나는 해마다의 반복을 당연하게, 그럴거라 받아들이며 이 겨울의 끝을 상상한다.


공간을 울리며 매섭게 불어대는 이 밤의 바람은 혹독하다. 바람부는 마당은 혹독함에 대책없이 방치되어 있다. 추위를 견뎌야 하는 텃밭도, 바람에 몸을 둥글게 말고 누운 라이도, 그리고 그 풍경을 바라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내 시선의 불편함도, 곧 지나가리라는 당연함을 믿고 기다린다. 순간을 그리고 시간을 버티는 일은 숨이 붙은 생명들에겐 어떤 의무이다. 그리고 살아가는 당연한 방식이다. 그렇게 모든 것은 당연과 반복의 뒤섞임이다. 그래서 하나마나한 한 해 동안의 이야기의 의미없는 마무리이다. 해가 바뀌면 의미없이 다시 시작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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