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텃밭일기 : 11월 28일

by 전영웅

뒤뜰 배수로가 더운 한 철 내내 자란 잡풀에 뒤덮여 있었다. 배수로 너머는 내 키만큼 높게 바위축대를 쌓은 밭이다. 바위축대 사이로 덤불들이 자라고, 나무가 자랐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던 축대의 나무가 가지를 뻗더니 배수로 위를 넘어 뒤뜰을 가리기 시작했다. 축대 사이에서 자란 찔레 덤불은 매년 5월이면 하얀 꽃을 피워 그 예리한 가시를 생각하지 못하게 했다. 그러더니 올해는 줄기를 키워 우리집 뜰에 널어뜨렸다. 조금만 더 두면 뿌리를 내리거나 씨앗을 퍼뜨릴 심산이었다. 그것 말고도 환삼덩굴이나 깻잎처럼 생긴 이름모를 잡초들이 배수로 주변을 뒤덮어 자랐다. 주말 이른 퇴근을 하고, 나는 낫과 톱을 들고 배수로로 뛰어들었다. 보이는대로 밑둥을 치고, 축대를 감고 오르는 덤불들을 걷어냈다. 조금 두꺼운 것들과 길게 늘어뜨린 나무가지는 톱질을 해서 잘라냈다. 그렇게 우리집을 지나는 배수로 구간을 정리했다. 콘크리트로 견고하게 만든 배수로는 내 허리 깊이에 폭이 1미터 남짓인데, 작업을 마치고 나니 베어낸 풀들과 가지들로 수북해졌다. 비가 많이 오면 배수로에는 물이 흘렀다. 장마나 태풍 때가 되면, 많이 흘러야 발등을 적실까 싶은 수준으로 흘렀다. 그래서 배수로에 뭐가 좀 있다고 해서 물이 막히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정리는 해야 했다. 나는 배수로에 쌓인 덤불과 가지를 바라보며,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했다. 숙제같은 주변정리를 끝내고 나니 다음 숙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추워진다고 한다. 11월의 막바지에도 날은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포근했다. 잠깐 거친바람이 불고 서늘한 적도 있었지만, 을씨년스러운 날은 없었다. 부담스럽지 않은 날들이 마치 당연한 것처럼, 해마다 이맘때는 항상 이랬던 것처럼, 별다른 생각없이 지내다가 날이 추워진다는 소식은,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한여름 무덥던 날들의 한복판에서 언제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올 지 고대하던 때가 얼마 안 된 것 같다. 그런 기대는 포근한 날들이 주는 안위에 망각하고 있었고, 겨울이 온다니 뭔가 새로운 대비를 해야 할 것 같은 약간의 긴장이 일었다. 배수로를 정비하고 나서, 나는 텃밭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후 햇살이 따뜻한 토요일 오후였다. 나는 잠시, 지금까지 푸르게 버텨 온 고추들에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지주대를 뽑고 고추들을 뽑아 내었다. 뽑아낸 고추묘목은 잔디밭에 모아두었다가 먹을 만한 것들을 거두어내고는 뒤뜰 구석에 쌓아두었다. 아마도 올해 마지막 텃밭 수확물일 것이다. 나는 여전히 여름고추의 아삭한 식감과 단맛과 매운맛의 조화가 그립다. 생기 가득한 날 것의 감칠맛을 다시 느끼고 싶다. 하지만 모든 것은 때가 있어서, 그 때를 존중하지 않으면 인간의 간사한 감각으로 인해 이내 식상해지고 만다. 늦가을의 풋고추는 크기도 작고 식감도 질기다. 그럼에도, 하나 잘 씻어 고추장에 푹 찍어 먹으면, 마치 옛 풍경의 기억이 떠오르듯, 여름철 아삭한 생기의 흔적이 가늘게 느껴지는 것이다. 기억의 끝을 잡고 흔적의 꼬리를 휘젓는 일도 올해는 이것으로 마무리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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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상추로 심은 아삭이 상추에 꽃대가 올라왔다. 전부 뽑아내었다. 무도 둥치가 꽤 굵어지고 높아져서 뽑아서 요리에 사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겨우내 먹을 녀석들이니 일단 길게 늘어진 이파리들을 꺾어주었다. 이러면 뿌리가 더 굵어진다고 했던가.. 며칠 비가 오고 습한 바람이 조금 불었더니 흙 속에 숨어있던 쪽파들이 서둘러 싹을 내었다. 기존에 먼저 싹을 낸 녀석들은 가뭄에 성장을 멈춘듯 했는데, 오늘 보니 한 뼘씩 더 자란 것 같다. 겨울상추로 심은 적상추도 뿌리를 내렸는지 이파리에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멀칭한 자리에 심은 양파들은 줄기가 꼿꼿했고, 옆으로 심은 완두도 싹을 내기 시작했다. 문제는 캐모마일 싹이 땅을 빼곡하게 채우며 같이 올라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캐모마일 덤불을 막아보려 멀칭을 한 것인데, 멀칭을 피하고 구멍을 찾아 심은 작물들과 같이 올라오는 것이었다. 인해전술은 이래서 무섭다. 지금은 어렵고, 조금 더 자라면 작물 주변의 캐모마일들은 일일이 뽑아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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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 주변의 잡초들을 정리했다. 딸기덤불은 말라 죽은 듯 했는데, 가만히 보니 좀 더 구석으로 퍼져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구석까지 뻗어 미처 캐내지 못한 고구마 줄기들이 늦가을 공기를 이겨내며 잎이 파릇했다. 그 옆으로 대파들이 가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귤나무는 제 색대로 익은 귤 몇개를 매달고 겨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죽은 단풍을 뽑아 정리한 자리엔 살구나무를 심을 생각인데, 언제 심으면 좋을지 가늠 중이다. 참새들의 놀이터가 되어버린 매화는 올해엔 꽃이 좀 펴 주려나.. 올해 매화는 참새들이 꽃망울을 다 뜯어먹는 바람에 꽃이 하나도 달리지 않았다. 그 전에, 가시덤불처럼 빽빽해진 저 가지들을 좀 쳐줘야 할 것 같은데,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바람골에 키높이 자란 유칼립투스는 어떻게 해줘야 할까 좀 난감하고, 감나무 아래서 얌전치 못하게 웃자라버린 폴리안은 가지치기를 어떻게 해줘야 할지 고민이다. 늦가을에 기온이 잘 맞았는지 멕시칸부시 세이지가 보랏빛 털꽃을 풍성하게 피웠고, 그 아래로 주황의 타라곤들이 꽃을 피워 분위기를 냈다. 그 풍경을 여유롭게 보고 있는 내가, 문득 한 철을 지나 여유가 생겼구나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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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은 얼마나 추워질까? 작물들을 걱정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는 제주고, 텃밭은 알아서 계절순환의 오르내리막을 겪어낼 것이다. 항상 그래오듯 말이다. 날이 추워지면, 나는 손을 쉴 수 있어 좋다. 그 시간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으니 기대마저도 든다. 내 무심함은 그렇게 겨울을 관통할 것이고, 알아서 겨울을 날 텃밭은 나와 상관없이 순환의 생리 속에서 성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순간은, 농어를 잡은 날 매운탕에 넣을 무를 고를 때 뿐일 것이다. 그러니까 주말의 텃밭작업은 올해의 정말 마지막 작업인 셈인 것이다. 이제 끝이라 해도 자잘한 일거리가 이어지던 지난 가을의 그런 미련이 아니라, 손을 쉴 추위 직전의 마지막 단도리이다. 한 해의 무언가를 이렇게 마무리하며 버텨냈다는 마음의 든든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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