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의 텃밭일기 : 10월 9일

by 전영웅

하루 종일 진료실에만 있다가 일주일에 하루 반, 낮시간의 바깥을 즐길 수 있는 주말의 마당은 더웠다. 추석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고, 9월을 넘어 10월이 되어 있었다. 한낮의 온도는 30도를 넘어섰고, 철모르는 더위에 별 생각없이 자전거를 타고 나섰다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쾌적한 가을하늘을 기대하며 앉은 마당 필로티는 바람이 없었으면 더워서 힘들 뻔 했다. 계절에의 기대와 계절의 변덕이 충돌하고 있었다. 그리고 비는 오지 않았다.


일교차가 커서 낮에만 더웠지 아침저녁으로는 서늘했다. 일교차 덕인지 출근시간 마당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텃밭은 그 이슬로 근근히 가을가뭄을 견디고 있었다. 그것이 충분할 리는 없으니 나는 다시 호스를 잡고 간간히 물을 뿌려 주었다. 발아시기부터 가뭄에 시달렸는지, 쪽파의 순 끄트러미가 노랗게 말랐고, 무 싹은 벌레들이 주둥이를 대었다. 가을에 내가 호스를 붙잡고 물을 주게 될 줄은 몰랐다. 가을 텃밭은 무 싹만 두세번 솎아주면 손 볼 일이 거의 없었다. 올해는 가뭄을 걱정하며 물을 주어야 했다. 이것은 그저 올해 가을의 일시적 현상일까, 아니면 앞으로 지속될 계절특성의 변화일까? 콜라비와 브로콜리를 심은 몇천 평 밭에 몇 주 동안 충분한 비가 내리지 않아 고생 중이라는 누군가의 글을 보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주 작은 고민거리에 불과하니, 작은 텃밭에서 먹고사니즘의 고민이나 기후위기의 걱정을 하는 건 비웃음을 사도 아무렇지 않을 일이다.

EDA8AE50-EF78-478C-83F0-4B09602C8B23.heic

그러다가 날이 흐려지며 비가 조금 오더니 갑자기 쌀쌀해졌다. 날이 쌀쌀해진 건 예년 기온을 생각하면 정상적인 현상이다. 문제는 몇날 며칠 동안 해를 볼 수 없이 비가 추적거리다 하늘이 흐리다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가 내리니 가뭄은 일단 해소가 되었지만, 해가 없으니 날이 상대적으로 춥고 우울해졌다. 이 역시 하루 종일 진료실에만 있는 나에겐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급격한 날씨변화에 텃밭이 어떻게 견딜 것인가 하는 걱정, 그리고 이제 필로티 그늘 아래 앉아 여유있게 먹고마시는 일은 힘들게 되었구나 하는 아쉬움이 생겼을 뿐이다.


마당은 축축하고 무거웠다. 그 분위기에 물든 라이 녀석도 평소보다 덜 움직이고 심심해했다. 청명한 가을햇살에 빛을 머금은 하얀 털로 마당을 뛰어다니던 겨우 며칠 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밀림이 된 고구마밭은 이제 슬슬 수확을 해야 한다. 그 옆의 귤나무에 매달린 귤들은 노랗게 익기 시작했고, 감나무의 감들도 주홍으로 무르게 익어갔다. 보편의 가을정경과 일부러 눌러 무거워진 공기가 뒤섞여 조금은 불편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주말이 되어 나는 일찍 퇴근 후, 예전처럼 필로티 아래 캠핑의자를 하나 펴고 앉았다. 블루투스 스피커로 좋아하는 라디오를 켜고, 손에는 장갑을 낀 채로 그 우중충한 마당을 바라보았다. 라이 녀석은 들어가라는 집은 들어가지 않고, 비그늘 아래 웅크리고 누워 주변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여유를 부리다 일어나 텃밭으로 들어가 빨갛게 익어버린 고추들을 땄다. 태풍에 기절하다시피 했던 고추들은 다시 새순과 꽃을 펴내고 있었다. 먹을 만큼 커진 가을 고추를 거두었다. 가지도 마찬가지였다. 껍질이 각질처럼 딱딱해지고 크게 자라지는 않았다. 그래도 먹을 만한 것들이 많이 보여 같이 거두었다. 무 순을 마지막으로 솎아주었다. 일정 간격으로 딱 하나씩만 놔두고 다 솎아내었다. 가을텃밭 작업은 이제 마지막이다 싶었다. 가끔 자잘한 일들로 텃밭을 들어올 일은 있겠지만 말이다.

5B1653AF-981E-440A-8AF1-B443E7F4770A.heic

덥고 힘들었던 날씨와 쌀쌀하고 우중충한 날씨가 단 며칠 차이로 교차했다. 힘들지는 않아도, 적응은 쉽지 않았다. 감기에 걸리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날씨가 이렇게 제 마음인데, 인간은 날씨 마음에 맞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다시금 무한자의 알 수 없는 그 마음과 의도에 몸을 움츠릴 뿐이다. 또는, 가을이 없어진 것 같은 이 날씨의 변덕은 인간이 초래한 것이라고도 이야기한다. 인간의 무절제한 발전과 이기심이 생존의 발판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절제함과 이기심을 버리고 생존을 위한 터전을 복구하고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하는데, 많이 요원해보인다. 아니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 지 모를 정도로 너무 멀리 온 것은 아닌가 싶어진다. 나는 잘 모르겠다. 다시 말하지만, 손바닥만한 작은 땅에서 장난처럼 텃밭을 운영하는데, 너무 거창한 이론이나 사상을 논하기엔 매우 우습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내가 심은 것들에 대한 일말의 책임은 져야 한다는 생각만 오롯하다. 거대하게 뒤덮은 현상과 사상의 그늘아래 작게 움직여야만 하는 내가 걱정하고 행동할 수 있는 건, 나의 그늘아래 작게 자리한 것들에 대한 최선의 노력이자 책임 뿐이다. 내가 지고 얻을 수 있는 세상의 몫은 아직 그 정도이다. 그리고 그 소소함에 위안을 주는 것은 주말에의 적당한 알코올이다.

keyword
이전 18화2022년의 텃밭일기 : 9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