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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Oct 17. 2022

[다시 읽기] 그리스인 조르바

  부불리나가 죽어가는 장면은 여전히 인상적이다.  헛것과 가쁜 숨에 매달려 괴롭게 버둥거릴 때, 창문으로 그 모습을 확인한 부랑아들은 부불리나 집 마당의 닭을 잡고 마당에 불을 피운다.  망자를 떠나보내는 곡소리를 하는 두 할망은 끝까지 숨을 놓지 않는 부불리나에게 어서 가라고 애원한다.  그래야 망자의 살림을 자기들이 챙겨갈 수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 조급함에 숨이 끊어지지도 않은 부불리나의 앞에서 서둘러 곡소리를 했다가 조르바에게 머리채를 쥐어잡힌다.  망자의 살림은 하나하나 가치를 매긴 다음, 동네의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나누어주는 것이 통상의 원칙이었다.  그러나, 부불리나의 시신이 집 밖으로 나간 직후 집안에 남겨진 살림은 조르바가 챙긴 앵무새가 든 새장과, 바닥을 굴러다니던 빨간 술이 달린 뾰족구두 한 쪽 뿐이었다.  


  초원 위에 코끼리 한 마리가 죽어갈 때, 그 주변을 서성이며 코끼리의 숨이 멎기만을 기다리는 하이에나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생존본능으로만 가득한 야생과 자연의 광경이, 인간사회에서도 그대로 벌어지는 장면이었다.  본능과 이성이 만들어내는 경계는 어느 지점까지인가의 의문이 생겼다.  이성을 월등하게 압도하는 본능과 무질서, 몰염치를, 우리는 함부로 비난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 그대로를 인간본성의 자유로써 존중할 수 있을까?    


  조르바의 마초적 자유로움은 우리에게 버겁다.  현대사회에서는 범죄가 될 수도 있는 방종과 사기가 곳곳에 존재하고, 여성폄하의 만연이 아무렇지 않다.  그러나 조르바는 배운자들의 지식을 조롱하고 유식을 뛰어넘는 유용한 무지를 갖추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본능적 감각을 믿으며, 자유로움을 종교처럼 숭배한다.  오로지 감각으로 무너지기 직전의 갱도에서 사람들을 탈출시키고, 자유로움에 거슬리는 대상이라면 자신의 손가락조차도 과감하게 잘라버린다.  마음에 드는 여자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품에 안으며, 사업주의 자금을 탕진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뻔뻔함까지 가지고 있다.  조르바는 분명 문제적 인물이다.  그리고, 이 소설이 실화에 기반하였고 조르바 역시 실존인물임을 생각하면, 카잔차키스의 사업적 무능까지도 생각해 볼 만한 단적인 면이 있다.  


  카잔차키스는 무능했다.  그리고 그의 무능은 머리와 가슴에 먹물을 품은 이들의 무능을 대표한다.  붓다의 사상을 공부하고 실천하려는 그는 매번 조르바에게 조롱을 받다가, 결국 지나는 길의 과부의 유혹에 이끌려 허무해진다.  그의 유식함은 매번 조르바의 무지에 답을 제공하지 못한다.  죽음은 우리에게 가깝고 자연스러운 것임을 깨닫지만, 먼저 죽은 친구의 외로운 눈물을 꿈 속에서 바라보는 장면은, 그가 여전히 죽음에의 두려움과 삶에의 욕망이 건재하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소설은 조르바의 마초적이고 무모한 자유를 통해, 인간의 본능은 원초적 상태의 어느 지점까지 허용이 가능한가를 고민케 한다.  동시에, 인간의 지식과 사상은 과연 조르바와 같은 상태의 방종과 무지를 어디까지 통제할 수 있으며, 어떤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가 고민케 한다.  부불리나의 죽음을 둘러싼 무질서와 몰지각을 통제하고 비난할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었다.  조르바는 부불리나의 죽음 그 자체에 집중했고, 유식한 두목 카잔차키스는 그저 그 모습들을 바라만 보고 있었으며, 마을의 어른과 선생은 하고자 하는 관습을 온전히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모습은, 인간의 지식과 사상, 그리고 구조는 정말 가치있는 것인가 라는 고민에 빠지게 만든다.  펜대를 굴려 쓴 먹물을 머리 속에 집어넣은 유식자가, 천방지축의 무식한 조르바의 매력에 빠져 무장해제 당한다.  사회적 인간의 보편적 조건인 이성적 사고는, 감각에 충실한 본능에 항복했다.  인간을 구성하는 이성과 본능은 어떤 비율이 적절한 것일까?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통해 인간문명의 고고함이나 숭고함 같은 것들을 위선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려 작정한 듯 했다.  수도승들은 세속에 물든 속물들이거나 또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부적응자들의 은둔처로 묘사한다.  마을 분위기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사람들 앞에서 목이 잘려 죽어야만 했던 과부를 위로하는 이는 이방인 조르바와 카잔차키스 뿐이었다.  하늘은 언제나 반짝이고 바다는 언제나 아름다울 때, 인간이 사는 마을은 언제나 탐욕과 위선이 가득했다.  그 사이에서 돋보이는 것은 언제나 조르바의 마초적 본능이었다.  다시 읽는 그리스인 조르바는, 첫 독서때 느낀 막연한 자유에의 환상과 동경에서 벗어나, 이성과 본능의 경계, 무지에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유식의 한계, 그리고 사상의 겉포장 속 뚜렷하게 자리한 원초적 본성을 생각하게 했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디서 어떠한 방식으로 찾아볼 수 있는가, 논리와 체계를 쉼없이 추구하는 현재의 인간들은 인간다움을 갖추고 있는 것인가.  고민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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