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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텃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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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Apr 23. 2023

2023년의 텃밭일기 ; 0423

  벚꽃이 화사했다.  감각으로는 예년보다 2주 정도 빨리 피는 느낌이었다.  벚꽃이 만발할 시기에 일주일 이상 비가 오지 않으니, 화사함은 오래도록 풍성함과 어울렸다.  작년 이맘때 즈음, 개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신없고 피곤할 때, 잠깐이라도 마음 좀 달래보자고 출근길을 돌려 제주대 입구 벚꽃길을 지나곤 했었다.  멍한 눈과 마음으로 잠깐의 화사함을 감상한 기억은 일 년이 지나자 작은 트라우마 같은 것이 되어서, 벚꽃은 이제 개원 때의 스트레스를 떠올리게 하는 기제가 되어버렸다.  병원은 그럭저럭 안정적이니 스트레스는 서서히 사라질 것이다.


  벚꽃따라 두릅도 일찍 순을 올렸다.  머위도 덩달아 풍성했다.  나는 여전히 출퇴근의 루틴에서 쳇바퀴를 돌리고 있었는데, 마당은 어느새 봄이 되어 내 손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연은 그리고 마당은, 때에 잘 맞춰 움직여주어야 한다.  인간의 리듬은 원래 자연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는 듯, 인간사의 쳇바퀴 따위는 의미없고 개의치 않는다는 듯, 마당은 어서 나의 손이 닿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는 다시 바빠지겠구나..  나의 삶은 출퇴근의 쳇바퀴와 자연의 순환에 갇혀 버렸다.  

  주말 오전진료를 마치고 퇴근하자마자 장화를 신고 텃밭에 들어갔다.  마당에는 성능이 괜찮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티트리나무에 걸어두고 라디오를 켜두었다.  삽을 들고, 텃밭을 한삽 한 삽 뒤집었다.  며칠 전 비가 온 뒤라 땅은 부드러워 삽이 잘 들어갔고, 먼지가 덜 나서 좋았다.  흙을 뒤집을 때마다 괭이밥과 광대나물 뿌리들이 뒤집어졌고, 사이사이로 겨울잠을 자던 장수지네와 굼벵이들이 놀라서 꿈틀거렸다.  한 번에 두 이랑 만큼을 뒤집고 나와 라이 집 옆에 의자를 두고 쉬었다.  라이는 자기 옆에 아빠가 앉아있으니 좋아서 덩달아 옆에 앉아서는 등을 만져달라고 졸랐다.  삽에 뒤따라 나온 벌레들이 잘 보였는지, 지나던 새들이 텃밭 가장자리 담벼락에 앉아 눈치를 보며 벌레들을 노리고 있었다.  다시 텃밭으로 들어가 흙을 뒤집고 두 이랑만큼을 뒤집은 뒤 나와 라이 옆에서 쉬기를 반복했다.  자연의 순환에 따라 몸을 움직이지만, 몸은 일 년의 간격에 적응하지 못하여 땀이 쏟아지고 허리와 엉치가 아팠다.  그래도 일은 익숙해져서 텃밭을 다 뒤집고도 해가 남았다.  남은 해는 나에게 여기저기 일거리를 보여주었다.  마당에는 검질이 가득했다.  


  이제는 가는 날의 골갱이를 들고 마당에 쪼그려 앉았다.  잔디를 잠식하며 뒤덮는 검질들을 뿌리까지 뽑아야 했다.  해가 바뀌면 검질들도 모습을 바꿔 마당을 잠식했다.  작년 가을엔 선택적 제초제를 뿌렸는데도,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니 검질들은 더욱 살아보겠다고 몸부림을 치는 것 같았다.  해가 저물어 그림자가 길어지고, 날이 살짝 어두워지는 즈음에 나는 어기적 일어나 허리를 펴고 일을 정리했다. 마당에 함께 있어 신났던 라이의 표정이 집으로 들어가는 내 모습에 살짝 시무룩해졌다. 

  한 주가 지나서는 텃밭에 멀칭을 했다.  인위적인 일들을 되도록 하지 말자는 주의였지만, 이제는 효율과 편리를 생각해야만 했다.  힘들어 지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멀칭할 자리를 길고 반듯하게 만든 다음, 비닐을 깔았다.  이 역시 삽을 들어야 하는 일이었고, 처음 해 보는 작업이라 멀칭자리는 예쁘게 정리되지 않았다.  작업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마당의 검질매기..  텃밭에 잔디가 침범해서 잠식한 자리도 거둬내어 텃밭자리를 만들고 멀칭해주었다. 그렇게 4월의 작업은 생각했던 대로 마무리했다. 


  두릅은 거두어서 어른들께 보내고, 친구들을 불러 삶아서 같이 먹었다.  올해 두릅은 향이 괜찮았다.  제주는 더운 지역이어서 그런지 나물에 향이 많지 않다.  그래서 그런지 두릅향기는 왠지 뿌듯함을 주었다.  대신 두릅나무들이 몇 그루 죽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유독 추웠던 겨울 며칠날의 스트레스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마당에 풍성한 머위 역시 따다가 쪄서 쌈장과 밥을 싸서 먹었다.  약간의 쌉싸름함의 매력은 이제 나도 어른의 맛에 익숙해졌음을 알게 해 주었다.  넉넉한 비에 고사리가 풍성하여 라이를 데리고 아내와 산책겸 고사리를 꺾으러 다녔다.  삶은 고사리로 육개장을 했고, 일부는 말려두었다.  감나무, 레몬나무, 유칼립투스, 포도나무 등등의 모든 나무에서 이파리가 본격적으로 나기 시작했고, 캐모마일과 딸기꽃같은 봄꽃들이 살구꽃에 뒤이어 피었다.  모든게 조금씩 빨랐던 4월의 마당은 점점 초록으로 풍성해졌고, 나 역시 풍성함에 비례하여 분주해졌다. 

  하지만, 아직 모종은 심지 않았다.  4월의 변덕은 조심해야 한다.  조금씩 이른 자연은 조금 이르게 기온도 올렸지만, 일교차가 심하고 언제 갑자기 기온이 뚝 떨어질 지 모를 일이다.  이 섬의 4월은 섬에 녹아있는 슬픔을 충분히 위무하다, 묵묵히 몸을 놀려 봄을 준비하며, 느긋하게 때를 기다려야 하는 달이다.  5월이 시작되면 바로 모종을 사다 심을까 싶지만, 그래도 살짝 생기는 조바심은 숨기기가 어렵다.  제비 역시 생각보다 일찍 찾아와 작년의 둥지를 수리하고 있었다.  월동한 양파가 알이 배지 않아 마음이 아쉽다.  미세먼지와 바람이 말미를 장식하는 4월을 보내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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