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하나의 길에서만 서 있었고, 황혼이라는 저녁의 시간에 하루라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일은 정직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나는 아직 알 수 없다. ‘하나의 길에만 서 있다’는 일의 집중과 몰입을 이해하기엔 너무 많은 곁눈질을 해 왔고, ‘삶을 돌아보는 일’은 내겐 아직 어울리지 않을 만큼 먼 이후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생의 몰입이 만드는 황혼에서의 경직된 생각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래서 나는, 스티븐스에게 연민을 느끼면서도 온전한 이해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가 생각하는 품위와 집사로서의 충성심은 경이롭되, 존중할 수 없는 것이다.
집사로서의 충성스러운 삶을 살며, 한 치의 실수나 오차도 허용하지 않던 그가 노년에서야 처음으로 즐기는 혼자의 여행은 서투르기만 하다. 길을 잃고 연료가 떨어지는지도 모른 채 운전을 하며, 사람들과 만나 보여주는 모습은 언제나 경직되어 있기만 하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것들이 그다지 의미 있게 다가오지 않는 듯하다. 그렇게 여행을 하는 내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자신의 품위와 충성을 자위하고, 스스로의 삶을 합리화한다. 그리고, 황혼 이후로도 이어지는 자신의 삶에 집사로서의 품위와 충성을 어떻게 하면 유지할 것인가만 고민한다. 2차 대전 전후의 격동하는 영국 사회에서 휘몰아치는 수많은 파도 안에서 휘어지지 않고 곧게 살아온 그는, 올곧지만 옳을 수만은 없는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는다.
그를 어떻게 연민할 수 있을까.. 그를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자신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노년의 모습으로 만나 회상만으로 과거의 애정을 확인하는 그를 동정할 수 있을까? 같은 집사였던 아버지가 죽어가는데, 중요한 연회를 지휘하느라 임종도 지키지 못하고 다른 하녀들에게 부탁하면서도 자신을 합리화하는 모습에 나는 분노를 느꼈어야 할까? 나치에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고 동분서주하는 주인에게 오로지 충성만으로 힘을 보태는 우직함에 답답한 마음이 들었어야 할까? 어쩌면 당연한 감정적 반응들인데도 나는 스티븐스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태도와 과거에 대한 자기합리화에 설득당했을지 모른다. 그것이 아니라면, 당시 영국 사회의 상황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다는 조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작품 해설에서 이야기하는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까지 들이대며 스티븐스를 비난하는 것은 조금 과하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나치에 이용당하며 그들을 이롭 게하는 반역이긴 했지만, 스티븐스는 그 지점까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주인이 하려는 일을 보조하는 충직한 내적 조력자였을 뿐이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집사의 역할은 주인이 하는 일이 순조롭도록 내조에 충실하는 것이지, 주인이 하려는 일에 관심을 갖거나 참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정말 대단한 주인을 만나, 복잡하고 화려하게 돌아가는 세상의 중심과 정점에 가까워지는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만이 존재했을 뿐이다.
거의 평생을 영국에서 보낸 작가이지만, 고향 일본에서의 정신적 결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섬세한 묘사와 치밀한 구성으로 거칠기만 했던 과거 영국의 한 시대를 그려낸다. 감정과 생각의 묘사는 너무 디테일해서 인물에의 몰입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거칠고 넓은 풍경 안에서 그려내는 조밀하고 섬세한 정물화 같은 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오래전에 발표된 영화가 무척 궁금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