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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텃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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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Jun 11. 2023

2023년의 텃밭일기 : 0611

  텃밭의 입장에서는 무난한 날들이었다.  바람이 부는 날이 있었지만, 이파리가 타들어갈 만큼의 바람은 없었다.  예년보다 날이 덥고, 비도 많이 왔다.  걱정없이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들이었다.  처음으로 멀칭을 해서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큰 걱정없는 마음으로 텃밭을 바라볼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 날씨요인이 상당했다.  멀칭의 효과보다는 말이다. 


  멀칭은 검질과 작물과의 분리라는 점에서 가장 효과적이었다.  땅 온도를 높이고, 수분을 가두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관리하는 입장에서 가장 좋은 것은 검질과의 분리였다.  작물이 자라기 좋은 환경에 검질도 따라 무성해진다.  멀칭을 하니, 그 위로는 검질이 자라지 못했다.  멀칭구간 사이로 드러난 흙에서 무성해질 뿐이었다.  이전처럼 기를 쓰며 이랑과 고랑의 검질을 매어 줄 필요가 없었다.  너무 크게 자라는 녀석들이나 너무 넓게 퍼지는 녀석들을 골라서 뽑아주면 될 일이었다.  신경쓰이는 것은 텃밭 구석으로 무성해지는 검질들이었다.  그 속에서 고추나 호박 등의 진을 빨아먹는 톱날노린재들이 숨어있다 작물로 달려들곤 했다.  신경써서 구석의 검질들을 매어주었다. 

  고추는 줄기가 자라며 두 개 또는 세 개로 갈라졌다.  갈라지는 부분 아래로 곁순을 모두 따 주었고, 지주대에 묶은 끈을 풀어 갈라진 줄기 하나에 높이를 올려 묶었다.  가지도 마찬가지였다.  애호박과 오이도 줄기를 뻗으면서 아래 꽃망울들이 옹기종기 맺혔다.  한두개를 남기고 모두 따 주었다.  오이는 늘어지는 줄기를 잡아올려 지주대 위로 묶어주었다.  토마토 역시 곁순을 모두 따 주고 높이를 올려 매어주었다.  바질은 곁순이 무성해졌다.  일단 좀 더 자라면 곁순을 따서 요리재료로 사용할 생각이다.  아내는 토마토 절임을 맛있게 만든다.  수박은 여러 줄기가 사방으로 퍼지는 중이고, 작년에 씨가 떨어졌었는지 토종호박과 늙은호박 싹이 멀칭 사이에서 싹을 틔워 무섭게 자라고 있었다.  각각 한 그루씩만 두고 나머지는 뽑아내었다.  


  고구마를 심었다.  양파를 뽑은 자리로 캐모마일이 무섭게 자랐다.  하얗고 노란 꽃을 피우던 캐모마일들도 더위에 지치며 누렇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 덤불 아래로 힘겹게 자라던 완두가 결국 덤불에 뒤덮여 햇볕도 잘 보지 못한 채 말라가고 있었다.  모두 뽑아냈다.  양파를 심으려 깔았던 멀칭비닐도 걷어냈다.  주변을 정리하고 흙을 삽으로 뒤집은 다음, 구간을 정해서 비닐 멀칭을 했다.  구멍을 뚫고 고구마 모종을 간격을 두어 심었다.  무슨 고구마를 심을까 고민했었다.  예전 호박고구마를 심었을 때엔 수확시기를 너무 늦게 잡아서인지 다 썩어있었다.  보통은 밤고구마를 심어 쏠쏠한 재미를 보았었다.  굼벵이가 갉아먹은 상처만 제외하면, 우리의 고구마농사는 꽤 괜찮았다.  이번엔 욕심을 좀 내서 진밤고구마라는 품종을 심어보았다.  결과는 어떨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마당도 더운 날 따라 무성해졌다.  2월에 정리를 해 주었던 포도넝쿨은 다시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성해지고, 포도도 무척 많이 열렸다.  입구의 펜넬은 다시 사람크기만큼 키를 높여, 진입로에서 마당을 가렸다.  마당 잔디 사이사이로 난 검질들이 발목 위를 덮기 시작했다.  낮게 깔리는 이름모를 검질들은 잔디를 잠식하며 넓게 퍼지고 있었다.  구석의 레몬밤 덤불과 방풍, 쑥 등등은 일차로 낫으로 쳐내고, 나머지 자잘한 풀들은 전동예초기로 잘라냈다.  마당의 잔디와 검질들은 잔디깎기 기계를 꺼내 짧게 밀었다.  겁쟁이 라이는 내 손에 들리는 기구나 호스, 또는 마당에 오랜만에 나오는 기계에 꼬리를 내리고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다.  녀석이 좋아하는 것이라고는 내 손에 들린 간식, 털빗, 그리고 산책용 리드줄 뿐이다. 


  포기의 수순이랄까 아니면 적응의 과정이랄까..  텃밭과 마당을 관리하는 방법이 예전에 비해 많이 바뀌었다.  예전에 고수하던 방식이 정해둔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면, 지금의 방식은 원칙이 많이 무너진 모습이다.  텃밭에 인공자재를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다, 농약을 쓰지 않는다, 그리고 되도록 손을 쓴다.  지금은 멀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저독성 살충제와 선책적 제초제 또는 제초제를 사용한다.  그리고, 마당의 검질은 골갱이를 들고 손을 쓰다가 결국 포기하고 잔디깎기로 높이만 관리하고 있다.  종종 고민한다.  나는 원칙을 포기한 걸까?  그러나, 점점 사라지는 여유와, 점점 아파지는 허리와, 점점 소모되는 느낌의 체력을 생각하면, 오래도록 하기 위한 적응의 과정이라 생각도 든다.  변명이나 핑계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몸의 신호와 먹고사니즘의 직업적 입장변화는 이전의 원칙을 고수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취미인데 뭐 어쩌랴 하는 가벼운 마음도 있다.  이러니 마음 안에서는 스스로 타협안을 만드는데, 포기와 적응을 반반정도 할애하는 것이다.  고구마를 심고 텃밭과 마당을 정리한 징검다리 연휴 이틀간, 나는 집에 매어 있었다.  원칙대로 하자면, 이틀은 위에서 말한 작업들을 하기엔 너무 촉박한 시간이었다.  포기와 적응이 반반 버무려진 마음으로, 나는 멀칭을 하고, 기계를 사용하고, 구석진 자리의 고추와 수박줄기에 덕지덕지 붙은 톱날노린재에 살충제를 뿌려주었다.  그리고, 뒷마당과 배수로를 가득 메운 검질과 덤불들에 제초제를 넉넉히 살포했다.  그렇게, 이틀의 연휴를 체력이 허용하는 최대한의 노력으로, 생각했던 작업들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6월의 더위가 심상치 않다.  아직은 아침저녁으로 선선하다는 사실이 위안이지만, 올해 여름은 얼마나 더울지, 얼마나 비가 많이 올 지 두렵다.  하지만, 텃밭은 그만큼 일찍 무성해질 것이다.  고추와 가지꽃이 많아졌고, 오이와 호박도 생각보다 꽃이 많이 피었다.  텃밭은 더욱 무성해질 것이고, 아직은 쌈채소 정도인 먹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추와 가지 호박 오이 등등으로 풍성해질 것이다.  텃밭의 목적이자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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