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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텃밭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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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웅 Aug 13. 2023

2023년의 텃밭일기 : 0813

  휴가를 다녀왔다.  일주일간 라이는 혼자서 집을 지켰다.  잠깐이라도 마당에 사람들이 오가고, 밤에는 불이 켜지던 집에 갑자기 정적이 흘러 외로웠을 것이다.  낮에는 더위와 습기먹은 바람만 불었을 것이고, 밤에는 완벽한 어둠에 싸인 집에 조금 무서웠을 것이다.  어쩌다 보게 되는 택배 아저씨가 평소와는 다르게 조금 반가웠을 지도 모르고, 집에 자주 놀러오던 친한 지인들이 가끔 라이를 보러 와 주면 반가움에 꼬리가 떨어질 것 처럼 흔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당이 검질로 점점 무성해지고, 담벼락 주변과 텃밭이 점점 초록의 풀들로 뒤덮이는 모습을 알게모르게 보아야 했을 것이다.  발이 닿는 곳까지 풀이 무성해지니 똥을 눌 자리를 잡는 일도 조금 거슬렸을 것이다.  먹을 것과 마실 물은 미리 넉넉하게 챙겨두어 걱정은 없었는데, 혼자서 적막하고 정리되지 않는 마당을 지키는 일은 꽤 지루했을 것이다.  휴가를 마치고 무거운 슈트케이스를 끌고 집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라이는 미친듯이 뛰기 시작했다.  반가움은 숨겨질 수가 없어 꼬리는 조금만 툭 대면 뚝 부러질 수도 있을 것처럼 붕붕 휘날리고 있었다.  나는 끌던 슈트케이스를 놓고 마당으로 달려가 라이를 안고 열심히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하고 반가운 마음이었다.  라이가 내 살을 마음껏 핥도록 가까이 붙어 팔을 내 주었다.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나간 마당에서 라이는 수풀 사이를 걸어다니고 있었다.  일주일 사람이 없었다고, 마당과 텃밭은 조금만 더 방치하면 밀림이 될 것 같았다.  마치 사람의 발자국에는 풀들의 성장을 억제하는 힘이라도 있다는 듯 말이다.  휴가 마지막 날의 하루는 그래서 마당과 텃밭일에 매달렸다.  전기예초기를 들고 마당의 잔디와 바랭이들을 낮게 쳐 냈고, 담벼락 풀들은 낫으로 한 번 쳐낸 다음, 예초기를 돌려 마무리했다.  라이가 일주일간 배설한 똥까지 치우고 나니, 그제서야 라이는 수풀을 벗어나 잔디밭을 자유로이 걷고 있었다.


  텃밭도 정리를 했다.  아니, 제대로 정리할 수준이 아니었다.  바랭이들은 곧 씨를 퍼뜨릴 것 처럼 꽃대를 바짝 올리고 있었고, 멀칭은 이것들로 뒤덮여 모서리를 가늠할 수 없었다.  잘못 건드리면 멀칭비닐이 다 뜯겨 올라올 것 같았다.  우선 예초기를 조금 높게 들고 바랭이 꽃대들부터 쳐냈다.  텃밭 주변은 낮게 내려서 검질 줄기들을 다 쳐냈다.  작물들이 다치지 않게 하는것이 관건이었다.  날은 무척 덥고 습했고, 작업에 완급조절을 하지 않으면 내가 땡볕에 쓰러질 수도 있는 날이었다.  여러모로 텃밭에 적극적으로 손을 댈 수 없는 조건이었다.  득을 보겠다고 생각한 멀칭은 다른 함정을 만들고 있었다.  

  그래도 잔치는 계속되었다.  수박은 지난 번에 이어 두 개가 더 열려 점점 커지고 있었다. 가지는 거의 무한대로 열리고 있어 식사때마다 입이 행복하다.  고추는 여전히 아삭했다.  그런데 날이 너무 더워서인지, 좀 매워지고 있었다.  오이고추를 심었는데도 말이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속이 점점 부담스러움을 이겨내지 못하는데, 고추가 매워지니 하나 들고 베어물기가 살짝 겁이 나고 있다.  오이는 이제 더 열리는게 없다.  토마토는 왜 심었는가 회의가 들 정도로 잘 열리지도 않은데다가, 익는 족족 풍뎅이들이 달려들어 파먹고 있었다.  호박은 작년과 비교해서 잘 열리지 않고 있다.  그러니까, 가지의 풍성함과 아삭한 고추의 부담과 수박의 신기함만 남은 시즌이다.  다른 것들은 예년에 비해 뭔가 좀 이상할 정도로 잘 되지 않고 있었다.  날이 너무 더워지고, 더운 날들이 길어지면서 생기는 현상이 아닐까 싶다.  땅의 컨디션은 작년과 다르지 않을텐데, 멀칭을 했다고 크게 달라질 일도 아니고 말이다.  기후변화 때문이 맞다면, 이제 그 위기는 이미 우리집 마당까지 들어와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날이 너무 더워져서 보이는 현상들은 더 있다.  라이가 몸을 쉴 새 없이 물어뜯고 긁어댔다.  워낙 물을 싫어하는 녀석이라 털이 좀 지저분하긴 했지만, 스스로 그루밍을 해서 더워도 문제없이 지내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달랐다.  배쪽의 피부도 좀 건조해보였다.  목욕을 시키기로 했다.  물을 싫어하는 녀석을 목욕을 시키는 일은 정말 힘든 일이다.  주인인 나도 이빨에 물릴 각오를 해야 하는 일이다.  물론 이빨질 경고로 대부분 끝나긴 하지만, 위기를 느끼는 녀석이 물지 않을 거란 확신은 없는 법이니까.  머리를 써서 비닐가방에 네 개의 구멍을 내서 다리를 고정하고 물을 천천히 뿌려 목욕을 시켰다.  샴푸를 해 주고 물을 뿌려주기까지 녀석은 매우 불안해했다.  마지막에 가방이 찢어져 녀석이 튀어나갔지만, 다행히 거의 마무리된 상태였다.  보송하고 깔끔해진 녀석은 꽤 근사해졌고, 몸을 긁는 일도 많이 줄었다.  

  노린재들이 예년에 비해 너무 창궐했다.  알까지 부화했는지 새끼들까지 가세해서 고추 줄기에 빼곡하고 매달려 있었다.  아침 출근마다 막대기로 털어주었지만 그 때 뿐이었다.  한창 먹거리가 나올 때에는 방제같은 것은 하지 말자 주의였는데, 올해는 달랐다.  고추가 시들어 말라죽어가고 있었다.  약을 쓸 수 밖에 없는 상황..  가지고 있는 저독성 살충제를 뿌렸지만, 녀석들은 거의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 비오킬을 하나 사서 뿌린 다음에야 사라졌다.  마음은 놓였지만, 일주일 정도는 비를 기다리며 잔치를 잠시 멈추어야 한다는 아쉬움이 생겼다.  


  태풍 카눈이 지나갔다.  태풍 진로의 좌측에 제주가 있었고, 비바람이 그다지 심하지 않아 큰 걱정은 되지 않았는데, 생각대로였다.  태풍이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제주는 조용했다.  잠시 불어오는 태풍바람에 공기가 좀 시원해져서 살만 했다.  그리고 다시 무더위가 찾아왔다.  8월의 중순, 이제 무더위는 좀 사그러들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데, 기후변화는 아무래도 더운 공기를 좀 더 오래 머물게 할 것이다.  소나기나 한여름의 비라던지, 그런 것부터 기다려야겠다.  되도록이면 쉬는 날, 마당 필로티에서 의자를 놓고 앉아 내리는 비를 가만히 감상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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