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 되자마자 완두를 심었다. 생각해 두었던 틀밭의 잡초들을 모두 거두고 흙을 살짝 뒤집은 다음, 간격에 맞춰 완두 세 알 씩 심었다. 전날 여름비 같은 겨울비가 내려 흙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검질을 매는 일도, 완두를 심는 일도 수월했다. 지난 가을에 심고 남은 양파와 누가 심으라고 건넨 대파 모종을 같은 틀밭 한 쪽으로 심어서, 완두를 심을 자리는 조금 줄었다. 검질을 매는 김에, 양파 멀칭구멍과 쪽파 멀칭구멍에 난 검질들도 손으로 일일이 뽑아 주었다. 예년보다 그다지 춥지 않은 겨울이었다. 심고나서 이틀 후면 매서운 추위가 찾아온다고 했다. 입춘 다음날인데, 얼마나 추울까.. 완두가 발아하는 데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하지만, 어차피 심어버린 일.. 추위를 느끼면 발아를 알아서 늦추겠지 하는 마음으로 내려놓아야 할 일이다. 발아가 안 된다면, 시기가 좀 늦더라도 다시 심으면 될 일이다.
2월이 되자마자 완두를 심은 건, 순전히 나의 일정 때문이다. 생각은 2월 중순 전에 심는 게 맞을 듯 한데, 첫 주가 지나면 여러 일정으로 심을 시기를 놓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매번 이야기한 대로, 나의 텃밭관리는 나의 일정에 따른 것이다. 자연의 일이라 자연의 시기를 맞춰 작업을 해야 하는 게 텃밭농사의 정석인데, 작업의 반 정도는 나의 일정이 관여한다. 그래서, 조금 이른가 싶긴 해도, 큰 추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음에도, 시간이 날 때 완두를 심었다. 역시, 완두는 알아서 발아할 것이고, 발아가 실패한다면 다시 심을 것이다. 내 일정대로 듯, 내 생각대로 말이다.
선물로 건넨 텃밭의 무는 달고 맛있었다고 한다. 이번 겨울 무 농사는 비교적 잘 되었다. 천천히 그리고 게으르게 알아가는 농사법. 역시 비료는 적기에 넉넉히 주어야 했다. 5월의 모종심는 시기에 웃거름 주는 시기를 잘못해서 모종을 모두 죽일뻔 했다. 모종이 뿌리를 제대로 내리기를 기다리는 것이 관건이고, 가을겨울 농사 역시 발아가 되고 모종이 충분히 자랐을 때 비료를 넉넉히 주는 것이 관건이었다. 선물로 건넨 루꼴라와 고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노지에서 억세게 자라 향이 강한 루꼴라에 반한 지인은, 마트에서 루꼴라를 사 먹어보고는 그 맛이 아닌 것에 실망했다고 한다. 겨울에도 텃밭은 풍성했다. 정작 주인인 나는 체중관리로 식사조절을 한답시고 겨울 텃밭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있었다.
예보대로 매서운 추위가 찾아왔다. 차에서 측정되는 외부 온도가 영하 3.5도였다. 육지에 비하면 낮은 온도는 아니지만, 제주에서는 도로가 얼고 눈이 묻지 않고 쌓이는 상황에 많은 것들이 마비상태에 가까워진다. 이번 겨울에는 윈터타이어로 교체하지 않았는데, 추위가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도로상황이 좋지 않아 몇 번을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했다. 지난 겨울에는 영하 5도를 기록했는데, 이번 겨울은 그렇게까지 추워지지 않았어도, 눈이 오는 모습으로는 이 정도 눈이 쌓인 것은 거의 7-8년 만의 일이 아닐까 싶었다. 바람도 심하게 불어 결항이 속출했다. 불륜커플들을 속수무책으로 고립시키는 겨울의 폭풍.. 덕분에 서울에 갈 일이 있던 아내는 결항 소식을 접하고 다음날 아침 비행기를 부랴부랴 예약했다. 공항가는 일도 문제였다. 눈길에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별 수 없이 차에 체인을 장착하는 도중에 겨우 한 대 잡혀 무사히 공항에 갈 수 있었고, 나도 대중교통으로 두 시간에 걸쳐 출근이라는 고행을 겪어야 했다. 명절에 가지 못한 전주를 잠시 다녀올 예정이었지만, 날씨가 좋지 않을 거라는 예보에 일정을 모두 취소한 상태였다. 텃밭과 마당에는 눈이 쌓였고, 쉽게 녹지 않았다. 일정이 취소되고 시간이 비어버린 주말을 보내고 있자니, 그 풍경을 가만히 바라볼 수 있었다. 폭설과 바람과 추위에도 고집을 부리며 마당에서 웅크리고 잠을 자는 라이녀석을 차에 태우고, 날이 조금 풀린 바닷가로 산책을 다녀왔다.
추위가 물러가면 더 이상의 추위는 없을 거라고 한다. 꽃샘추위도 없이 잠깐의 봄기운을 느끼다가 바로 여름이라는 예보가 있었다. 추위가 물러간다는 사실은 내심 반갑긴 한데, 바로 더워진다는 사실에 걱정을 넘어선 두려움이 생긴다. 올해는 또 얼마나 더울 것인가.. 텃밭은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모종 심는 시기도 빨라질 것이고, 더위에 병충해 양상도 달라질 것이다. 모종의 종류 역시 조금은 달라져야 할 것이다. 2월의 초반이 지나가는 이 시점에 텃밭을 벌써부터 고민해야 하나 싶다. 올해는 그늘진 자리에 생강을 심어 볼 생각이다. 지난 생강은 말 그대로 ‘심은 만큼 거두었다’. 올해는 신경을 좀 더 써서 심은 것보다 더 많이 거두어 볼 생각이다. 아티초크를 키울 수 있다는 모종집 주인의 말에 시도해 볼 생각이다.
겨울바람에 색이 바랜 아스파라거스 줄기들을 잘라주고, 멀칭을 거둔 다음, 자른 아스파라거스 줄기로 흙을 덮어주었다. 아스파라거스는 3년 후에나 수확이 가능하다던데, 올해는 어떤 형태로 순이 올라오는 지 관찰을 해야 할 것 같다. 2월 말과 3월의 날씨 분위기를 잘 파악해야 한다. 온기가 돌아 무의 꽃대가 올라오기 전에 월동한 무를 거두어야 하고, 쪽파도 줄기가 좀 더 자라 올라오면 거두어서 파김치를 담글 생각이다. 기후변화 덕에 텃밭의 순환은 매년 달라진다. 달라진 모습 따라 작업의 시기도 잘 맞춰야 한다. 2월부터 텃밭에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되어버렸다. 틀밭을 하고 틀마다 심은 작물에 따라 관리 일정이 다양화 된 이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후변화 역시 한 몫을 하고 있음도 분명한 사실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