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무언가를 심는 일은 책임을 지는 일이다. 책임의 노고에 먹거리가 생기는 결실 역시 생기는 일이지만, 심고 나서 한 달 이상은 그저 책임과 노고만 존재한다. 기른다는 것, 결실을 얻는 일과 별개로, 기르는 일은 존재의 본능과 같은 행위다. 당장의 행위에 있어 당연함의 감정이 실린다. 그래서, 아이를 기르고, 반려동물을 기르고, 식물을 기르고, 그리고 경작을 한다. 작은 것들이 잘 자라고 성장할 수 있도록, 노심초사의 감정을 자연스레 지닌다.
5월이 그러했다. 심어놓은 것들에 눈빛을 자주 보내고, 시간이 날 때마다 손길을 자주 주었다. 그래야 하는 것이 텃밭이기도 하다. 시들지 않고 잘 자라주기를, 벌레들이 꼬이지 않기를, 파종한 것들이 어서 싹을 내기를 바라고, 그렇게 잘 자리잡아주길 마음쓰는 시간이었다. 며칠 비가 내리지 않으면 텃밭에 물을 뿌려주었고, 가늠할 수 없는 이 섬의 혹독한 바람에 심어놓은 것들이 꺾일까봐 지주대를 세우고 줄기를 묶어주었다. 작년과 달리 밤마다 서늘한 공기에 냉해를 입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뿌리가 적응하지 못해 노랗게 시들어가는 오이에 마음이 불편하고, 심고 열심히 물을 주었던 작두콩이 열흘 이상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아쉬웠다. 뿌리가 자리를 잘 잡았는지 키가 커지는 고추와 방울토마토들의 곁순을 열심히 따 주었고, 슬슬 보이기 시작하는 톱날노린재들에 방제약을 뿌려주어야 했다.
파종한 것들이 싹이 나면 반갑다. 그러나 나지 않으면 좀 더 기다려보다가 다시 심어야 했다. 이 일에는 아까움보다 아쉬운 마음이 크다. 보이지 않는 흙 속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씨앗들의 사정을 모른다. 그 자리에 다시 같은 씨앗을 심는 일은 사라진 이전의 씨앗에 대한 미안함이다. 이파리를 내기 시작한 것들을 솎아주는 일도 과감함보다 미안함이 큰 일이다. 맨 처음 그린빈을 솎아주었다. 버리기가 미안해서 텃밭 틀 바깥의 좁다란 자리에 하나씩 심었다니 다들 자리를 잡고 줄기를 뻗었다. 오크라와 딜 역시 그렇게 했다. 쉽게 버리지 못하겠다는 마음이다보니, 바람에 줄기가 꺾이고 서늘한 밤공기에 냉해를 입은 수박과 바질을 다시 심으며, 뽑은 녀석들을 옆자리 빈 터에 다시 심어주었다. 버티며 다시 자라주는 모습에 미안함과 뿌듯함이 실린다. 마지막으로 할라피뇨 싹을 솎아주고 오크라도 최종으로 솎아주었다. 더 이상 옮겨심을 자리가 없어 포트에 상토를 담아 심어두었다. 누군가 관심있으면 가져가겠지 하는 마음으로..
5월은 그렇게 결실없이 수고로 채웠다. 그러나, 결실이 없는 것은 아니다. 2월에 심은 완두가 살짝 노랗게 변하며 거둘 시기가 된 것이다. 고구마를 심어야 할 시기도 되었다. 완두가 심겼던 틀밭 하나를 정리했다. 정리하며 거둔 완두를 모으니 밥 짓는데 너댓번 넣을 만큼은 되었다. 완두를 넣은 밥을 좋아한다. 아침에는 오트밀을 간단히 먹고 있지만, 완두를 거둔 다음날 아침엔 특별히 완두를 넣은 밥을 해 달라고 아내에게 부탁했다. 정리된 틀밭에는 무슨 고구마를 심을까 고민 중이었는데, 옆 땅 주인이 물을 쓰게 해 줘 고맙다며 심고 남은 고구마 줄기를 건넸다. 양이 틀밭 하나 심기 충분해서 따로 고구마줄기를 구입할 일이 없어졌다. 물론 품종선택의 기회 역시 사라졌지만 말이다. 틀 안의 흙을 뒤집고, 토양 살충제를 조금 뿌려준 뒤, 이랑을 두 개 만들어 고구마 줄기를 나란히 심었다.
텃밭은 대부분 자리를 잘 잡아주었다. 작기만 하던 호박과 참외모종이 줄기와 이파리를 무성하게 내기 시작했다. 토마토는 말 할 것 없다. 오이는 뿌리적응에 힘들어하다가 결국 자리를 잡고 줄기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고추는 고추대로 무난했고, 그린빈은 덩굴품종이라 세워준 지주대 높이가 아쉬워지고 있다. 가지는 뿌리적응은 한 듯 하나 예년보다 서늘한 공기에 아직 키를 키우지 않고 있고, 냉해로 이파리 끝이 거뭇해지던 수박도 결국 적응하고는 줄기를 내기 시작했다. 심은 지 한 달이 지났다. 텃밭은 점점 무성해지고 있다. 이제 웃거름을 주어야 할 때다. 농장에서 웃거름 비료를 한 포대 사서, 비가 예보된 전날 멀칭 구멍 안쪽으로, 뿌리와 약간의 간격을 두고 비료를 넉넉히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내리는 비에 든든해지던 마음..
이상기후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년과 재작년의 5월은 무척 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올해 5월은 생각보다 덥지 않았다. 밤에는 서늘하거나 적당한 온도였다. 그러니, 지금의 5월이 오래전 기후위기의 말들이 자주 들리기 전, 그 때의 5월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모른다. 일 년 주기로 기온의 변화를 겪는 우리는, 겨우 1-2년 전의 느낌을 가까스로 기억해 낼 뿐이다. 원래 5월의 공기가 이랬는지 느낌으로는 알 수 없었다. 기억으로는 예전에는 수박이나 참외모종은 노지에 직접 심을 때엔 고추나 가지를 심고나서 한 달 정도 뒤에 심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고추와 가지를 심을 때 같이 심어도 되는 작물이 되어 있었다. 수박의 냉해를 보며, 예전에는 그랬었지 하며 노심초사의 감정을 안았었다. 그러나, 냉해를 이기고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우는 모습에 그래도 날은 더워졌구나 하는 안도의 감정을 안았다. 원래의 상태는 알 수 없다. 그런 것 따윈 없는 것인지 모른다. 변하는 기후에 인간이 알아서 대처해야 할 뿐이다. 하루하루, 한 해를 반복하며 살아가는 텃밭주인에겐 그것이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