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텃밭일기

2025년의 텃밭일기 : 0706

by 전영웅

기억으로는 몇 번 정도의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었다. 장마라는 소식이 들리고 하루이틀 지난 뒤였다. 그 뒤로 비는 오지 않고, 흐린 하늘에 몇 개의 빗방울이 흩날리는 날들이 며칠 이어졌다. 날은 점점 덥고 습해졌다. 비가 좀 더 오려나 궁금하던 찰나에 하늘은 개고 뙤약볕이 내렸다. 가끔 덥고 건조한 남풍이 불어닥치기도 했다. 비는 언제 오려나 기다림이 좀 더 깊어질 무렵, 기상청은 제주와 남부지방의 장마가 끝났다 선언했다.


하늘의 일은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날씨는 대통령이 바뀌고 내란세력들이 수사를 받고 있다는 굵직한 소식만큼 듣지 않을 수도, 들리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다. 특히, 땅과 바다를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 그리고 나같이 조그마한 텃밭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날씨 예보는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는 소식이다. 그러니까 약 두어 달 전의 예보는, 올해 장마와 여름은 비가 많고 폭우수준일 것이라 했다. 그래서 그 즈음 텃밭을 준비할 때도, 토마토와 오이 지주대가 바람에 넘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신경을 많이 쓰기도 했다. 하지만, 바람은 적당했고, 덥고 건조한 남풍에 잎이 말라가는 안타까운 광경을 목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길을 먼저 알려준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앞날에의 불안을 잠식시켜준다. 하지만, 알려준 정보와 맞닥뜨린 현실이 서로 상이한 순간, 불안은 당황으로 바뀌어 어찌할 줄 모르는 순간으로 닥쳐온다. 다행하게도, 땅은 당장의 단적인 혼란을 만들어내지도 않고, 그런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는 완충법이 있다. 단지, 약간 실망을 품은 인간의 노동이 좀 더 들어가야 할 뿐이다. 슈퍼컴퓨터로 예측한다는 자연의 변화는 여전히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영역임을 깨닫는다. 인간의 오만함이 유난하게 도드라져 있음을 느끼는 순간..

IMG_9949.jpeg

잠깐의 장맛비가 내리고 날이 급격하게 더워지면, 제일 신이 난 자리는 텃밭이다. 작물들도 하루가 다르게 무섭게 자라고 잡초들도 덩달아 무섭게 자란다. 이 시기엔 텃밭에 들어가기 무서울 정도로 풀들이 무성해지고, 빨리 자라는 잡초들은 작물들을 뒤덮어버리기도 한다. 이럴 땐 정말 어떤 결기를 품고 텃밭에 들어가야 한다. 적지에 고립된 아군을 구출하러 가는 특수부대 요원처럼, 모자와 긴팔과 수건 등으로 중무장하고 장갑낀 손에 호미를 들고, 잡초에 파묻힌 작물들을 구출해야 한다는 굳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예전엔 하루 종일 텃밭에 쪼그려 앉아 이랑과 고랑의 잡초들을 매곤 했었다. 지금은 그게 너무 힘들어 틀밭에 멀칭을 했더니 수고가 3분의 일 이하로 줄어든 느낌이다. 그런데, 올해는 상황이 좀 달랐다. 멀칭을 하긴 했지만 비 이후의 무성해진 텃밭과 더운 날씨로 땅이 말라가는데, 나는 2주 내내 주말마다 서울 세미나와 부산 협회발표 건으로 육지를 다녀와야 했다. 작물마다 주었던 웃거름은 잡초들이 먹고 쑥쑥 자라고 있었으며, 더위를 타고 노린재들이 작물들에 붙어다니기 시작했으며, 토마토와 오이는 급격하게 자라며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였다. 그리고, 호박잎은 더위에 축 쳐져 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중한 시기에 시간이 부족한 비상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중 퇴근 후 해가 남은 시간에 바로 호미를 들고 텃밭으로 들어가 틀밭 하나씩 잡초를 매고, 잠깐이라도 물을 주는 작업을 해야만 했다. 틀밭 하나 한 줄씩, 매일 그렇게 작업을 하니 2주가 걸렸다. 주 중엔 퇴근 직후 잠깐 작업을 하고, 주말엔 육지에 다녀오고.. 나름 마음이 분주한 시간을 보내다 3주 째가 되는 토요일 오후, 작정하고 텃밭과 마당을 손보았다.

IMG_9954.jpeg

아침부터 폭염경보가 내려진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긴 바지와 긴 팔로 햇볕을 막고, 장갑을 끼고 호미와 전정가위, 톱과 낫을 챙겼다. 마당 그늘엔 의자와 물을 채운 다라이를 놓았다. 텃밭은 어느 정도 정리된 뒤였지만, 마당과 집주변이 밀림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당 한쪽 구석 담장부터 시작하여, 돌틈과 로즈마리 등등을 감싸고 자라는 덩굴줄기들과, 나무 사이에서 불쑥 자란 강아지풀과 구석에서 자란 민들레 등등을 뽑아냈다. 곳곳에서 비집고 나오는 두릅싹을 애써 잘라내고, 털머위와 방풍을 낫으로 쳐냈다. 레몬밤과 민트는 이제 너무 지겨운데, 그만큼 밀림이 되어 낫으로 쳐내지 않을 수 없는 녀석들이 되었다. 사이사이 여름꽃과 부추가 손을 멈칫하게 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과감해야 했다. 뒤뜰 역시 환삼덩굴과 강아지풀과 키를 높인 바랭이와 어디서 날아와 싹을 틔웠는지 모를 찔레를 쳐냈다. 깻잎을 닮은 잡풀도 너무 많아져서 열심히 쳐냈고, 집 앞을 노랗게 물들였던 금계국도 이제는 시들어가며 옆으로 퍼지기에, 과감하게 쳐냈다. 그리고, 구석을 음산하게 뒤덮은 두릅나무를 잘라냈다. 두릅은 순이 날 때 따서 먹는 즐거움은 있지만, 번식력과 생장력이 너무 좋아서, 집 안으로는 들여선 안되는 나무다. 도시 사시는 어른들이 집에서 두릅을 따 먹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는 마음 때문에 심었지만, 심어서는 안 될 나무였다. 무성하게 휘날리는 포도 덩굴도 손질해주고, 순을 여기저기서 내는 무화과도 손을 봐 주었다. 무더위 속 반나절의 작업, 수시로 그늘로 돌아와 물에 발을 담가 더위를 식혀주고 물과 맥주를 즐기며 작업을 이어나갔다.

IMG_9953.jpeg

미친듯이 퍼지는 호박과 수박은 서로 곁을 두고 경쟁하는 것 같다. 잎 아래 보이지 않는 바닥으로 호박이 숨어 늙어가고 있었고, 수박이 자라 신발 크기로 자라고 있었다. 참외도 이제 하나하나 열리기 시작했다. 그린빈은 지주대가 부족해 서로 몸을 꼬아 줄기가 공중에서 하늘거렸고, 오크라도 날이 더워지니 제 모습을 보이며 먹을 것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 심어 본 할라피뇨가 자리를 잘 잡았으나, 아티초크는 구석에서 더위를 힘들어하는 모양새다. 올해 고추와 가지는 좀 아쉽다. 원래 잘 되지 않는 자리긴 했지만, 올해는 유독 더 가늘고 늦게 자라는 느낌이다. 맺는 고추도 가늘고 길어지기만 한다. 오이는 갑작스런 더위에 힘을 잃고 있었고, 토마토도 웃자라기만 할 뿐 그렇게 많은 것들을 맺지 않고 있다. 고구마는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잡았고, 생강은 소식을 잊고 있었는데, 구멍 여기저기서 순을 제법 올리는 중이다.


장마 전 살구 열 개 정도가 열려 익어서 먹어보았더니 달고 깊은 맛이었다. 나의 태생과 연이 깊은 열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얼마 열리지 않아 좀 아쉬웠다. 마당을 정리하는 중에 무화과 두어 개가 익어 따서 먹었더니, 역시 달고 깊은 맛이 느껴졌다. 7월 초의 무화과라니, 날이 확실히 덥긴 덥나보다 싶었다. 숨어있던 호박 두 개와 오이 두 개를 거두고, 먹을만한 고추와 그린빈을 거두었다. 토마토도 몇 개.. 아쉽지만 아쉬운대로 그리고 부족하지도 않은 양이었다.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먹거리가 나오는 이 때가, 텃밭의 보람을 느끼는 때다. 갓 거둔 것들의 생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이 시즌은 더위로 힘들지만, 그 생기 때문에 버틸 수 있는 여름이다. 보람 덕에 감내하는 수고로움, 비가 내리기 전 까지 몸과 마음이 수고로워야 할 듯 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