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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텃밭일기

2025년의 텃밭일기 : 0810

by 전영웅

한 달은 축제였다. 이상기후가 자아낸 폭염에 텃밭은 뜨거웠다. 뜨거운 만큼 먹거리들을 폭발적으로 맺어냈다. 한 해 텃밭농사의 절정이자, 봄 여름 텃밭의 막바지임을 느끼게 하는 풍성함. 폭염에 지친 몸이 폭염으로 풍성해진 텃밭에 즐거움과 위안을 받는 시기. 비 한방울 내리지 않아 이파리들이 축 늘어지면, 뜨거운 햇볕 아래 스프링클러를 틀어 물줄기가 흩어지는 시원한 광경을 연출할 수 있는 한여름..


하지만, 텃밭도 폭염을 즐길 줄 아는 녀석들이 따로 있었다. 덥다고 모든 작물들이 더위를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텃밭은 고추가 잘 되지는 않았다. 고추는 더운 데서 잘 된다고 알고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닌 듯 했다. 너무 더우니까 고추들이 굵어지지 않고 길이만 길어지는 기이한 모양으로 자랐다. 호박 역시 알맹이가 맺히고 보기 좋게 자라야 하는데, 자라는 동시에 늙어버리는 현상으로 색이 바래고 모양이 울퉁불퉁했다. 가지 역시 너무 더우니 잘 맺히지 않는데다, 열린 것도 모양새가 크지 않았다. 오이는 늦봄 초여름을 즐기다 지금은 다 말라버렸고, 토마토 역시 맺는 수량과 모양이 그리 좋지 않은 채 벌레들의 먹잇감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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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를 가장 잘 즐긴 녀석들은 수박과 참외였다. 그 둘은 무더위가 시작되자마자 줄기들을 사방으로 무섭게 뻗기 시작했다. 진정 농사꾼이라면 그런 줄기들을 전정해주고 관리해줘야 한다. 하지만, 게으르고 방치하자 주의인 나는 말 그대로 그냥 놔뒀다. 그럼에도 수박은 네 덩이가 열렸고 그것들은 그대로 축구공만하게 자랐다. 올해 수박이 비싸다고 했는데, 우리 텃밭에서 내다 팔아도 될 정도의 수박에 네 개나 열리니 횡재한 기분까지 들었다. 게다가, 때가 되어 쪼갠 수박은 정말 잘 익은데다 달기도 정말 달아서 방치농법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성공적인 농사가 되었다. 마침 제주에 오신 장인 장모님에게 드리고, 친구들 모임이 있어 내놓은 수박은, 극찬 일색이었다. 참외도 마찬가지였다. 방치한 덩굴 곳곳에 초록으로 매달리던 녀석들이 커가면서 노랗게 변했다. 적당히 익은 녀석을 거두어 먹어보니, 무척 달았다. 이런 횡재, 이런 호사가 없었다. 한 달 가까이 제주에 머무신 장인 장모님은 그런 텃밭에 무척 즐거워하셨다. 아침이면 텃밭에 들어가 수박이 잘 익어가는지, 참외가 잘 익어가는지, 숨은 호박은 없는지, 고추와 가지를 거둘만한 것이 있는지 살피셨다. 그렇게 즐기는 분들에게 수박과 참외는 효자 과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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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빈은 덩굴형을 심어 그런지, 여기저기 줄기만 뻗어 엉키다가 무더위에 시들해진 느낌이다. 정작 껍질콩은 얼마 맺지 못했다. 틀밭 사이 통로를 잠식해서 다니는 데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무더위를 즐기는 건 할라피뇨도 마찬가지였다. 기대하지 않고 파종한 녀석들이 제법 자라더니, 사진으로 보았던 모양 그대로 할라피뇨 고추를 맺어냈다. 처음 거두는 품종이라 신기했는데, 그것을 그대로 쌈장에 찍어 먹는 아내의 모습에 잠시 놀랐었다. 나도 살짝 먹어보니 맵기보다는 맛이 있었다. 아내는 남은 할라피뇨로 피클을 만들겠다고 한다. 기대하고 파종했던 아티초크는 주변을 잠식한 덩굴들에 잘 자라보지도 못하고 잎만 겨우 내고 말았다.


포도도 무성하게 달렸다. 포도덩굴은 주변을 장악할 것처럼 무섭게 뻗더니 감나무와 티트리 나무를 올라타 덩굴손으로 억세게 잡아 매었다. 정돈되지 않은 덩굴과 이파리 사이사이로 포도알이 무성하게 달렸다. 장인은 포도를 일일이 거두시더니 포도액을 만들겠다고 설탕에 재웠다. 포도덩굴을 지탱하는 지주대도 삭아서 고정이 다 꺾이고 풀렸는데, 덩굴줄기가 억세서 그런지 모양을 유지했다. 내년엔 지주대 교체를 해 주어야 할 듯 한데, 어떤 자재로 어떻게 세워주어야 할 지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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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 역시 풍성해졌다. 장모님은 집 주변에 무성한 머위줄기를 거두고, 호박잎을 거두어 머위줄기 무침과 호박잎 데침을 해주셨다. 작고 못생겼지만 가끔 거둔 호박은 그대로 호박무침이 되었다. 가지도 무침이 되어 밥상 반찬으로 올라왔다. 고추의 아삭함은 매번의 즐거움이었다. 마당에서 집 안에서, 2년 만에 제주에 오신 두 분은 매 순간을 즐기고 즐거워하셨다.


사실 한여름 축제의 주체가 누구인지 조금은 헷갈린다. 분명한 것 같은 사실 하나는, 내가 주체는 아닌 듯 싶다는 것이다. 축제는 즐기는 주체가 있고, 즐김을 위해 분주히 뛰어야 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 주체는 무더위를 즐기는 텃밭 그 자체일 수도, 무더위의 텃밭에서 나는 것들을 즐기는 어른들일 수 있다. 생각해보면 나는, 누군가 즐기는 축제를 위해 분주히 뛰는 입장이다. 방치한다지만 덩굴을 정돈해주고, 무질서하게 뻗어나가는 줄기를 정리해주었다. 습한 무더위에 키를 키우는 마당의 잡초들을 예초기로 정돈해주고, 사이사이로 눈 깜짝할 새에 불쑥 올라온 잡초들을 뽑거나 잘라주어야 했다. 그렇게 애쓰는 내가 있으니, 마당은 나름 보기에 좋고, 텃밭에서 나온 것들을 즐기는 데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나도 즐겼지만, 나는 축제의 주최자이자 관리책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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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이던 축제도 이제 한풀 꺾이며 마무리를 해야 할 시기가 다가온다. 마무리를 하면, 가을 텃밭을 준비해야 한다. 무더위가 너무 심하고 오래 가니 조금 늦게 준비해도 될 듯 하지만, 시기는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으니 언제가 적절할 지 감각을 예민하게 세우고 감지해야 한다. 8월 한 달은 텃밭을 크게 관리할 일이 없었다. 살피다 먹을 것들이 보이면 거두어 오는 일이 전부였다. 잡초가 올라오면 그냥 두어도 무방한 날들이었다. 어차피 가을 텃밭 준비하며 한 번 정리정돈을 해야 할 터이니, 굳이 무더운 날에 애쓰며 몸을 쓸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비가 내리면 마당과 집 경계 주변을 잠식하는 잡초들만 주기적으로 예초기로 관리해주었다. 너무 더워서 날이 어서 선선해지기를 기다리지만, 선선해지면 나는 다시 바빠질 것이다. 그 전의 한여름을 나는 열심히 즐겨야 한다. 더워도 필로티 그늘에 앉아 시원한 얼음물이나 맥주를 즐길 수 있는 지금 이 시기를 나는 사랑해야 한다. 너무 덥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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