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일기에는 ‘덥다’라는 말을 많이 적은 듯 하다. 10월의 일기를 쓰려 하니, 여전히 더웠던 날들이 먼저 생각이 난다. 말 그대로, 여전히 덥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진 것은 맞지만, 낮에는 아직 더워서 가을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10월에 들어섰는데도, 한낮엔 차량이 감지하는 실외 온도가 30도 가까이 오르는 것을 보면, 차라리 선선한 여름이라고 하는 것이 이 시기를 설명하는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그러니, 시기라는 것이 있어 파종한 무와 쪽파가 늦더위에 웃자라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9월 초에 파종한 무는 단 이틀만에 싹을 올렸다. 낮더위와 잦은 비에 싹은 신이 난 듯 흙을 가르고 푸른 싹을 내었다. 쪽파도 마찬가지였다. 너무 일찍 심기는 했었다. 게다가 더위는 심자마자 며칠만에 푸른 줄기싹을 쭉쭉 뻗어올리게 했다. 너무 빠른 성장과 잦은 비는 몇몇 쪽파를 녹여버렸다. 그래서, 쪽파의 멀칭구멍 여러개가 비어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집근처 모종가게에서 쪽파 약간을 사정하여 구입한 다음 다시 심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너무 조바심을 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의 자라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보니 솎아주는 것도 일이 되었다. 집에 도착했는데 해가 있다면 우선 무가 자라는 틀밭부터 보고 솎아주는 시기를 가늠해야 했다. 나는 보통 두어 번 솎아준다. 파종량이 너무 많아서이긴 하지만, 구입하는 무 씨앗의 수량이 내 텃밭에 파종하기엔 너무 많고, 파종했는데 싹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보다는 일단 많이 파종해서 솎아주는 것이 마음 편하다. 그렇게 떡잎 다음으로 첫 잎이 나오려는 때 한 번, 그리고 본잎이 두세 개 정도 넓게 자랄 즈음에 한 번 솎아준다. 줄기를 땅 위로 길게 뻗으니 벌레들과 바람에 상하기 쉽다. 그래서 줄기가 상하기 전에 흙을 덮어 보호해준다. 그럼에도 벌레들을 막기는 부족하다. 되도록 약을 쓰려 하지 않지만, 여린 무 싹들은 적어도 한 번은 방제를 해 주어야 무가 제대로 모양을 잡는다. 올해는 뭐가 바빴는지 솎는 것도, 흙을 덮어주는 것도 게을렀다. 게다가 방제를 해 주지 못했다. 날이 계속 더우니 벌레들의 잔치가 될 것은 뻔했다. 간격을 맞춰 솎아준 몇몇 무가 그렇게 시들어버렸다. 서둘러 흙을 살피고 뒤늦게 방제를 했다. 간격이 빈 자리엔 뒤늦게나마 무를 다시 파종했다. 늦더위를 걱정했는데, 이제는 다시 파종한 무 씨앗 때문에 더위가 조금만 더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인간의 간사함이 배인 아이러니..
같이 파종한 고수와 루꼴라도 때가 맞지 않은지 싹이 제대로 올라오지 않았다. 방치수준으로 두긴 했지만, 몇몇 싹이 올라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좀 더 서늘해져야 제대로 된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을 것이다. 시기란 참 중요해서, 시기에 맞게 파종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시기에 맞지 않게 파종하거나 심으면 마찬가지로 식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거나 죽기 마련이다. 게다가 시기를 가늠할 수 없는 기후의 변화가 그것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든다. 기후의 변화로 길어진 더위를 즐기는 작물들은 가을 바질과 오크라였다. 바질은 9월 초에 심자마자 자리를 잘 잡더니 많이 자라지도 덜 자라지도 않은 채 적당히 크고 예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크라는 한여름에 잘 자랄 줄 알았는데, 9월이 되니 성장을 멈추고 여기저기 특유의 별모양 결실을 만들어냈다. 오크라를 요리해 보았으나, 딱히 우리 입맛에 당기는 채소는 아니었다. 여기저기 자라는 것들을 모두 거두어 집 근처 카페를 하는 대만 출신의 지인에게 선물했다.
덥지만 가을이고 추석명절이었다. 장인은 제주에 단 며칠이라도 내려오고 싶어하셨다. 하지만 몸이 좋지 않으셔서 이번 추석은 댁에 계시기로 했다. 우리도 집에 수험생이 있고, 내려오시겠거니 해서 어디로 갈 계획을 잡지 않은 긴 연휴였다. 급하게 아내가 명절 이틀을 장인을 뵈러 다녀오기로 했다. 마당 대추나무에 대추가 무겁게 열렸다. 돌이 많아 뿌리가 부실해서인지 나무 자체가 기울어버렸다. 얼른 지주대를 세워 나무를 지탱해주고, 익은 대추들을 모두 거두었다. 양이 상당했다. 바로 나무의 균형을 위해 가지들을 쳐 주었다. 뿌리가 제대로 자리할 때까지는 고육지책으로 나무의 성장을 조절해야 할 듯 하다. 선선해지자 수없이 맺기 시작한 가지도 거두고, 질겨졌지만 여전히 신선함이 충만한 고추들도 거두었다. 이들을 모두 싸서 아내편으로 보냈다. 장모는 추석이 아쉬워 마트에서 대추를 샀는데, 제주집의 대추가 더 달고 맛있다며 즐거워하셨다. 여든이 되신 노인 두 분 단 둘이 살고 있다는 것은,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지는 일이다. 잠깐이나마 아내가 올라갔고, 보낸 텃밭과 마당 작물에 기뻐하시는 모습에 나도 작은 위안을 얻었다.
반려견 라이의 집을 옮겨주었다. 녀석은 여전히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지만, 예전에 있던 위치로 집을 옮기니 다시 편해진 표정이었다. 그 옆의 구아바나무엔 손톱만한 구아바들이 열렸는데, 노랗게 익기 시작했다. 아스파라거스는 밀림이 되어 바로 옆 무를 심은 틀밭으로 기울어 해를 가렸다. 노끈으로 덤불을 묶어 반대편으로 고정했다. 덤불 속으로 메뚜기들이 자리를 잡고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마귀들이 곳곳에 출몰한다. 올해 감나무는 해거름 중이라 감이 달리지 않았다. 덥지만, 마당과 텃밭에는 서서히 가을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긴 연휴의 하루에 뒷마당을 손보았다. 뒷마당으로 가는 통로의 로즈마리 덤불을 전정해서 길을 넓히고 뒷마당에 쌓인 나무들을 화로에 넣고 태웠다. 이유를 알 수 없이 라일락들이 죽었다. 살펴보니 뿌리부분이 약해져 있었다. 흔들어보니 뿌리부위가 젖고 성기어 바로 부러졌다. 죽은 나무들을 걷어냈다. 주변의 덤불도 걷어내고 풀들을 예초했다. 화로에서 타들어가는 나무들의 열기가 아직은 버거웠다. 여전히 더운 날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