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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텃밭일기

2025년의 텃밭일기 : 1109

by 전영웅

고구마를 캤다. 매우 약소했다. 그늘진 자리라 그런 듯 했지만, 땅에 남아있던 양분이 꽤 넉넉했나 보다. 게다가 무더위는 땅 속 고구마보다 땅 위의 줄기를 더 무성하게 키워서, 약소한 고구마와 넉넉한 고구마 순을 선사했다. 하지만 고구마 순을 손질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내가 밭을 손보고 있는 동안 아내는 고구마 순을 다듬었는데, 먹을 만큼만 손질하고 나머지는 버렸다. 얼마 뒤 옆집 땅주인이 자기가 심은 고구마를 선물해 주었다. 사실 옆집과 우리집 고구마는 한 종류다. 옆집 아주머니가 심고 남아서 건넨 고구마 줄기를 심은 것이 우리 고구마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옆집 고구마는 정말 많이 나왔다.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덩치도 굵었다. 아무래도 햇볕과, 좀 더 진정한 방치의 결과가 아닌가 싶었다.


생강 역시 약소했다. 몇 년 전에도 그랬지만, 생강은 심으면 1+1의 느낌이다. 편의점 가면 그렇게 판매하는 음료수들 많지 않은가.. 씨 생강을 구입해서 심으면 딱 그만큼의 생강이 자라 거두어지는 느낌. 반음지 식물이라 가장 그늘진 자리에 심었더니 햇볕을 너무 못 받아 그런 것 같았다. 내년에는 조금만 심더라도 볕이 어느 정도 드는 자리에 심어봐야겠다. 아내는 거둔 생강으로 생강차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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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파를 심었다. 조생 양파와 적양파를 반반 섞어 심었다. 얼마 심지 못할 것 같았는데, 긴 틀밭 하나에 전부 심으니 작은 판 두 개를 다 심고도 멀칭구멍이 남았다. 남은 자리를 양파 한 판을 사다 심으려니 남을 양파가 아까웠고, 쪽파를 심자니 뒤섞이는게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같이 사 온 쪽파를 심었다. 쪽파를 너무 일찍 심어 심은 알맹이가 녹거나 사라지는 일이 많아졌다. 결국 다시 사다가 심는데, 5천원 어치의 거의 대부분을 심게 되었다. 그만큼 쪽파가 많이 죽었다는 이야기다. 조금 이상해서 죽은 자리들의 땅을 파 보았는데 한 자리에서 굼벵이가 나왔다. 굼벵이가 쪽파 뿌리도 먹나? 싶은 의아함이 생기긴 했는데, 어쩔 것인가.. 그냥 심어봐야지. 날도 선선해졌으니 쪽파가 좀 버텨주겠지 싶은 마음으로 말이다. 확실히 더워진 것은 맞다. 8월 말 9월 초에 심은 쪽파들이 별 문제없이 겨울을 나곤 했었다. 올해는 웃자라더니 시들어버리거나 뿌리가 사라져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확실히 뭔가 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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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가게 주인도 달라졌다. 주인이 바뀐 것 같진 않은데 일하는 사람이 달라진 듯 했다. 이전에는 가위를 들고 알아서 잘라오게 하고, 자주 갔더니 알아보고는 서비스도 잘 주시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무엇이 필요하냐고 묻고는 직접 모종판을 잘라주고, 쪽파 조금만 팔아달라고 부탁을 해도 그럴 수 없다며 단칼에 거절을 했다. 서비스는 물론 없었다. 텃밭에 심어야 할 것들이 많아서 다행이었지, 원칙대로 판매하는 모종을 가져왔다가는 모종이 많이 남을 뻔 했다. 어쩌랴.. 나도 자영업자의 입장에서 물건 파는 사람의 마음을 존중해주어야 하지 않겠나..


완두를 심었다. 넓은 틀 하나 멀칭을 걷어내고 밑거름을 뿌리고 땅을 뒤집은 다음, 고랑과 이랑을 만들어 간격을 두고 심었다. 잘 자라주려나 싶은데, 추운 날이 얼마 되지 않을 겨울을 생각하니 잘 자라줄 듯도 하고, 잠깐이라도 너무 추워지면 힘들어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생각이 많아진다. 땅을 상대로 일을 하는 입장에서 이런 걱정은 굳이 완두 뿐만 아니라 다른 작물에도 마찬가지기는 하다. 그럼에도 왠지 기대가 더 되는 작물들이 있다. 완두는 내년 봄을 기다리게 한다. 갓 지은 하얀 쌀밥에 연초록으로 알알이 섞인 완두의 맛을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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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 어느 순간 성장속도를 내고 있다. 이파리가 무성해지고 둥치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이번 무는 솎아주기와 새순 관리가 좀 부실하면서 간격조절에 실패했는데, 그럼에도 나름의 존재감을 발휘하며 열심히 자라고 있다. 얼마나 자라줄지 기대가 생긴다. 굵은 무 하나 뽑아서 낚시로 잡아 온 농어나 참돔 머리와 등뼈를 같이 넣고 푹 끓인 지리를 올해도 먹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으로 웃거름을 적당히 뿌려주었다. 완두 씨앗을 사면서 고수와 고들빼기 씨앗도 같이 집어들었다. 고수는 빈 틀밭에 아무렇게나 뿌려두면 알아서 싹을 낼 것이다. 겨울에 가끔 캐서 먹으면 좋을 것이다. 고들빼기는 시기를 잘못 샀는데, 별 생각없이 빈 틀밭에 뿌리고 난 다음에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향수가 불러 일으킨 욕심 때문일 것이다. 나는 고들빼기 김치를 좋아한다. 그것도 푹 삭힌 것으로 말이다. 어릴 적 쌉쌀하고 맛있게 시어진 고들빼기 김치 줄기와 물에 말은 밥을 잘 먹었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그런 고들빼기 김치를 좀처럼 먹을 수 없었다. 가끔 어디선가 파는 것을 주문해서 먹어보았지만, 향수를 느끼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냥, 내 밭에서 아무렇게나 자란 고들빼기를 캐다가 김치를 담궈볼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그냥 사다 뿌린 것이었다. 결국, 기약할 수 없는 행위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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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는 저녁 복싱운동 전 간단한 식사가 되었고, 고구마 줄기는 고등어와 함께 조림이 되었다. 생강은 설탕에 절여진 채 냉장고로 들어갔다. 가을 텃밭을 준비하면서 거둔 가지는 지인들과 나누었고, 고추는 너무 더운 날들이었는지 병이 들어 있어 거둘게 거의 없었다. 갓 따서 먹는 고추의 맛이 여전히 아쉬워 쪽파틀밭 한 자리에 있는 고추 두 그루를 남겨두었다. 병들지 않고 잘 버티는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아삭함보다는 질긴 식감이 점점 많아진다. 아스파라거스가 덤불이 되어 메뚜기와 사마귀들의 은신처가 되고 있다. 무가 심긴 틀밭으로 기울어서 덤불을 끈으로 묶어 반대로 당겨세웠다.


이제 몸을 움직여 밭일을 할 시기는 지났다. 완두 싹을 솎아주고 북돋고 웃거름 조금 주는 일 정도만 예상된다. 주변의 나무들의 잎들이 다 떨어지면 가지를 잘라주는 일도 해야 할 것이다. 짧은 겨울이겠지만, 몸도 그에 맞추어 쉴 수 있는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이제 눈으로 텃밭을 살피고, 글을 좀 더 쓰고, 책을 좀 더 읽을 수 있는 시간이다. 마음을 돌아보니 이 시기를 기다려 온 것 같기도 하다. 손발이 차가워지는 추위가 버겁긴 하겠지만,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추위가 주는 선물이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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