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통하게 물이 오른 모습으로 잘 자라던 완두는 몇 번의 바람과 급격한 온도변화에 줄기가 휘청였다. 그 바람에 서너 개가 밑둥이 꺾여 말라버렸고, 두어 개는 줄기 중간이 부러졌다. 그리고 푸릇함이 넘치던 모습들은 전부 이파리가 쇠어버린 모습이 되었다. 지주대를 세워줬어야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두기로 했다. 알아서 잘 클 것이라는 약간의 경험이 섞인 낙관이 들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싹이 두 개씩 올라온 것들이 있어 흙을 잘 털어 뽑은 뒤 말라버린 것들의 자리에 다시 심어주었다. 흙을 밑둥자리에 덮어 바람에 좀 더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
김장용 무를 심고 거름을 신경썼더니 무가 통통하게 잘 자라주었다. 이파리가 너무 길게 자라 아랫잎들을 모두 꺾어주었더니 둥치의 성장도, 굵게 자라는 무의 모습도 만족스러웠다. 날이 추워지자, 아내는 오뎅탕을 끓였다. 덩치가 좋은 무 두어 개가 벌써 오뎅탕과 저녁거리로 뽑혔다. 달고 맛있었다. 작년 무는 추위에 너무 시달려서인지 마지막에 약간 쓴 맛이 들었던가? 그억이 그러했다. 이번 무 농사는 여러 면에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보이고 있다. 1주 전, 농어낚시를 가서 넙치농어를 두 마리 잡아냈다. 한 마리는 보내주고, 한 마리는 손질하여 가져왔다. 살은 다시마에 숙성해서 회와 스테이크로 먹었고, 머리와 등뼈는 따로 얼려두었다. 조만간 텃밭의 무 하나를 뽑아 큰 냄비에 넣고 매운탕을 끊일 것이다. 직접 잡은 농어와 텃밭 무로 끓인 매운탕은 해마다의 내 숙제이자, 장인 장모님이 정말 좋아하시는 음식이다.
너무 일찍 심어 웃자란 쪽파들은 바람에 잎줄기 가운데가 모두 꺾였다. 이 역시 이대로 둘 생각이다. 겨우내 알아서 자라고 알아서 버티겠지.. 겨울이 지나고 봄이 가까워지면 물이 한껏 오른 쪽파로 파김치를 만들 생각이다. 날이 추우니 루꼴라가 잘 자란다.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뿌린 씨앗에 텃밭은 곳곳으로 루꼴라들이 무성하게 올라오는 중이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흐뭇해지는데, 너무 많아지니 이걸 어떻게 먹을까 하는 고민이 생긴다. 단순하게 생각하자면 샐러드도 좋고 주문한 피자나 햄버거에 넣어 먹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떻게 먹을지 마땅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루꼴라는 넘쳐나도 잘 걷어지지 않는다. 가끔 아내가 필요한 정도 조금 잘라 사용할 뿐.. 반면에 고수는 몇 번의 바람과 급격한 온도변화에 올라오던 싹이 모두 쇠어버렸다. 겨우내 알아서 자라겠거니 두고 있지만, 루꼴라만큼 잘 자라주지 않는 모습에 서운함이 생긴다. 그런데, 잘 자라지 않으니 서운하고 고수를 넣어 먹을 음식들에 대한 열망이 생기는 것이다. 쌀국수에 넣어 먹어도 좋고, 샐러드에도 좋고, 고기를 구울 때에도 같이 먹으면 맛있지 않은가.. 넘치니 어떻게 먹을 지를 모르고, 부족하니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이 청개구리 심보를 어쩔 것인가 싶다.
마당에 한 그루 있는 귤나무에 귤이 대여섯개 달려 특유의 색으로 진하게 익었다. 껍질도 두껍고 맛있는 종류는 아니어서 그다지 관심이 가지는 않는데, 이제 슬슬 따 주어야 나무도 좀 쉬겠다 싶다. 그런데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무 틀밭을 살짝 가리듯 쳐진 아스파라거스의 줄기들도 좀 세워줘야 하는데 그냥 두고 있다. 더운 날이 길어지니 포도 줄기가 감나무와 티트리나무를 타고 올라 휘감듯 자리잡았는데 그것도 그냥 두고 있고, 감나무 아래에서 줄기를 뻗으려 애쓰는 유칼립투스와 주차장 옆의 유칼립투스의 줄기도 잘라주는게 맞겠다 싶어도 그냥 바라만 보고 있다. 게을러진건가 싶지만, 이제는 몸을 쉴 때가 되었다는 마음의 결론이 몸에 족쇄를 채운 듯 싶다. 마음따라 갈 생각이다. 어차피 겨우내 어느 시점엔 마당의 나무들을 모두 전정해야 한다. 모과나무도 너무 웃자라고 있고, 살구나무와 앵두도 가지가 너무 무질서하다. 이파리가 아직 다 떨어지지 않았으니, 좀 더 앙상해지면 그 때 몸을 움직여도 될 것이다 싶다. 이파리가 모두 떨어진 무화과의 방향성없이 사방으로 뻗은 줄기를 보면, 몸을 움직일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이쟎나.. 몸이 좀 쉴 수 있다는 기대가 컸던 계절이니까, 나는 그 핑계로 몸에 게으름과 귀찮음을 넉넉히 담아 시선만 보내는 중이다. 그 시선 안에서 그늘진 곳에 세워둔 나무 둥치에서 올라오는 표고는 감상만으로도 즐거운 모습이다.
지난 달 거두었던 생강은 차가 되어 몸이 으슬할 때의 좋은 보양이 되어주고 있다. 고구마는 저녁 운동을 가기 전 간단한 요깃거리가 되어 주고 있다. 갓 거둔 신선한 가지나 고추가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지만, 계절을 따라야 하는 인간은 아쉬움 끝에 내년의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운명이다. 작은 텃밭에서 계절마다 먹을 것들을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은 재미이자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삶의 운치를 더한다는 건 정서가 풍요로워지는 일이다. 거기에 잠시의 게으름을 더하니 몸은 평온하다. 삶의 연속선상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하는 운명에 물결처럼 ‘함의 높낮이 또는 밀도의 변화’를 가질 수 있다는 건, 쉼의 관점에서 다행스런 일이다. 자연의 관점에서는 당연하기도 하고 따를 수 밖에 없는 순리이다. 자본이 흐르는 세상의 흐름 안에서는 좀처럼 만날 수 없는, 근본의 섭리.. 겨울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