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텃밭일기

2026년의 텃밭일기 : 0104

by 전영웅

푸르름이 가시지 않는 동네다. 검고 투박한 돌담 안으로 가득한 푸르름.. 그 모습이 사계절 내내 이어져 겨울까지도 이어지는 풍경은, 이제 익숙하면서도 가끔은 경이롭다. 바람에 실린 한기가 몸을 파고들어도, 이 섬은 따뜻한 섬이 맞다. 한겨울 돌담 안의 방치된 땅에도 무언가가 나직하게 자라 푸른 색으로 땅을 뒤덮고 있으니 말이다. 푸르름이 풍성한 한겨울의 밭은, 바람에 실린 한기가 몸을 파고들어도 밭에 들어가 작물을 가꾸어야 하는 인간의 노동이 그려진다.


흐린 하늘에 까마귀가 떼지어 날다가 빈 밭으로, 전깃줄 위로 내려앉는다. 빈 밭인듯 하면서도 무언가 푸르게 올라오는 너른 밭 한가운데로 동네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가로지른다. 물이 얼 정도의 추위가 한 번 지나고, 그 추위에 맹렬했던 바람 역시 지난 후, 풍경은 서늘함은 안은 채 고요하다. 내 텃밭도 그렇게 고난을 겪은 후 고요를 되찾았다. 고요를 깨는 유일한 존재는 마당의 강아지다. 텃밭 가장자리로 먹을 것을 찾아 들어오는 길고양이와, 마당 나무 높이 앉아 먹을 것이 없나 두리번거리는 산비둘기와 직박구리에 참을성없이 짖어대는 녀석.. 그러거나 말거나 텃밭은 그냥 그렇게 모습대로 겨울을 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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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모습을 잘 그리지 못한다. 겨울에 접어들며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뎅탕을 끓이느라 아내가 무 몇 개를 뽑았고, 쪽파 몇 개를 잘랐으며, 거친 바람에 완두 줄기가 꺾일 만큼 휘청거렸음에도, 나는 밭을 살피지 않았다. 바빠서라기 보다는 무심함이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해야 할까? 관심에의 노동을 쉬고자 하는 몸의 바람 같은 것이었다. 한겨울에도 푸르름이 가득한 밭에는 인간의 노동이 그려진다고 했지만, 푸르름이 적당한 내 밭의 겨울엔 인간의 노동이 스며들지 않았다. 방치의 미학이라 해도 좋고, 그냥 게을러졌다고 해도 좋다. 가만 놔둬도, 한 식구 먹을 만큼의 결실은 충분히 나온다는 경험에서의 계산 때문이라도 해도 무방하다.


게으름과 무관심의 관점에서 보면, 나는 이제 어느 정도로 마음이 차분해진 듯 하다. 얼마 전부터 나는, 텃밭을 처음 시작했던 때의 마음을 종종 돌아보고 있었다. 자연스레 떠올려지는 그 시절의 혼란함과 버티는 날들에의 괴로움은, 잠시라도 어디론가 도망하고 싶은 장소로서의 텃밭을 시작하게 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내 속에서 수시로 마찰하는 마음의 톱날이 있었다. 톱날은 살아가는 내내 나를 수시로 긁고 상처내고 때로는 가족과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었다. 상처를 다스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텃밭이었다. 마치 의무처럼 해마다 땅을 골랐지만, 땅을 고르고 무언가를 심어 길러야만 내가 잔잔해질 수 있었다. 총량을 채우지 못한 지랄맞은 시간에 대한 보상이나 안정제 같은 것이라 해도 좋다. 나도 이제 올해로 오십이 되었다. 지랄맞음이 점점 채워지는지, 차분함을 느끼는 시간이나 순간들이 늘고 있다. 마음의 톱날을 애써 무디게 다스려주었던 텃밭도, 이제는 놓을 수 있겠다 싶은 생각도 가끔 들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아무생각없이 텃밭에 무심해지는 나를 가끔 느낄 때, 마음이 달라지고 있구나 싶어지는 것이다. 내 텃밭은 본연의 의무에서 이제 한 발짝 물러날 수 있는 자격 또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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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있는 것들에 점점 부담이 늘고 있다.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하고 싶은 것들에의 욕망을 잠재우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 욕망은 서서히 가진 것들을 늘렸다. 그리고, 시간이 충분히 지난 지금은 욕망마저도 버거워진다. 정리가 필요해졌다. 그냥 너무 많아져서일 수도 있고, 정리가 필요한 삶의 시점일 수도 있다. 가진 것을 줄이고, 남은 것을 잘 활용하고, 더 이상 무언가를 벌이거나 들이지 않아야 한다. 욕망이 이제까지 내 삶의 역동이었다면, 이제는 차분하게 남은 소유를 돌보는 시간이 되어야겠다 싶어진다. 그 안에서 텃밭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게 될까? 아마 나는 여전히 땅을 고르게 될 것 같다. 이제는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너머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고 기르고 거두는 일이 이전에는 목적과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삶에 자연스레 녹아든 당연한 행위가 되어간다. 마치 숨 쉬고 밥 먹고 잠 자는 일 같이 말이다. 이렇게 쓰고나니, 점점 나이들어가는 나를 느낀다. 좀 더 분명해지는 마음의 전환, 기분의 변화가 느껴진다.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반복되며, 자연 역시 순환하고 반복한다. 나이듦의 시간 안에 텃밭의 반복은 자연스럽고, 그래서 유지해야 한다는 당연이 생긴다. 텃밭의 의미가 전환되는 순간이다.


조금 늦었나, 오늘은 마당의 나무들을 정리하려 한다. 가지를 쳐 주고, 텃밭에 약간의 손을 댈 생각이다. 뒤뜰에 쌓아 둔 지난 텃밭의 산물들을 태우고, 그 자리에 오늘 정리한 가지를 쌓아 말려두어야 한다. 어쩌면, 무심함은 불가능하고 한겨울의 노동은 나 역시 피할 수 없는 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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