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대체로 문자를 나열하는 행위와 글을 쓰는 작업이 내 마음 안에서 구분될 때 그러하다. 글을 쓰는 작업은 치열해야 하고 때로는 공부를 요하는 일이다. 그런데, 빈 지면에 감상만 가득하게 채우다 보면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하게 알고 쓰는 글인지 멈칫하곤 하는 것이다. 그럴 땐 글을 잠시 멈추고 자료를 찾아보던가 아니면 생각을 다듬어야 하는데, 고백하자면 나는 그런 멈춤에 게을렀다. 생각한 목표를 마무리하는 데에 급급하기 다반사였다. 그렇게 만들어 낸 글이 좋을 리도 없었다. 분주함과 시간 없음을 핑계로 대지만, 목표에의 완성은 있었어도 좋은 글은 거의 없었다.
마음을 다잡을 기회는 여럿 있었다. 그것은 주로 문장가들을 만나면서 였다. 글을 쓴다는 것의 환기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김규항, 조지 오웰, 강유원, 데이비드 하비, 로버트 L. 하일브로너 등등.. 글의 간결함, 글의 목적, 무엇을 담아야 하고 내 생각을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그리고, 글 안에 나의 지식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담고 풀어낼 것인가. 그렇게 담을 지식은 어떠한 깊이와 두께로 만들어내야 하는가..
이 책은 이러한 부분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책이다. 아주 오랜 시간, 커다란 가마솥에서 꾸준하게 끓여내어 깊고 진한 국물을 만들어내듯, 꾸준한 노력과 작업으로 한 줄 한 줄 써 내려간 손길이 느껴지는 책이다. 사실, 팩트라는 단 하나의 줄기를 붙잡고, 뿌리에 도달하기까지 머리와 가슴과 몸에서 힘을 놓지 않은 인내와 지구력이 내 마음을 압도했다. 윤동주라는 하나의 기둥에서, 간도의 역사와 용정 주변의 시대적 풍경과 사실들이라는 가지와 이파리들이 무성하게 자라난다. 한반도와 일본의 시대적 상황과, 연희전문학교와 교토대학의 시대적 풍경이 무성한 줄기로 뻗는다. 윤동주 이후의 조명작업에서 시대를 흐르는 개인사와 주변을 감싸는 사상적 풍경들이 새롭게 싹을 돋는다. 그런 나무 전체에 흐르는 윤동주의 시의 의미들은 새롭게 해석되고 재평가되어 팩트에 가장 가까이 서며 가장 적확한 모습으로 지금의 시대에 자리한다. 윤동주라는 시인을 중심으로 발굴해 낸 거대한 나무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평전이란 그리고 글이란, 치열하게 공부하고 찾아보며 팩트에 기대어 발로 쓰는 것이다!
윤동주에 대한 평가는 다양했다. 워낙 젊은 시절에 시를 써 내려갔고, 짧은 시절로 생을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들이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도 사후였다. 모든 것이 너무 간결해서 의미를 부여하기에 부담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평전은 윤동주를 사실에 가깝게 규정한다. 사촌 송몽규는 윤동주에게 어떤 의미였는가, 윤동주를 발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강처중의 명예회복, 그리고 윤동주의 동선과 그 시절의 시대상과 풍경들.. 선연하게 회복되었다. 시인 윤동주의 디테일을 밝힘으로 의미를 더욱 깊고 선명하게 만든 책이다. 그리고, 글이란 이렇게 써야 한다는 하나의 회초리 같은 책이다. 윤동주와 그리고 이 책의 저자는 시대에 예민한 감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