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는 눈꺼풀이 있으나 귀에는 닫개가 없다. 이 자체만으로 귀는 노출에 무방비한 수동의 기관이다. 귀는 소리를 듣는 기관이며, 따라서 소리에 무방비하다. 손으로 귀를 막아도, 소리의 파동은 막은 손을 뚫거나 측두골을 울려 고막에 도달하고야 만다. 소리는 공격적이다. 그것이 듣기 좋거나 싫거나에 상관없이, 기어이 고막에 도달하고 뇌신경을 자극하여 인간의 반응을 만들고야 만다. 소리는 그리고 소리의 파동은, 어쩌면 가장 강력하면서도 피할 수 없는 무기이다. 세이렌을 거부할 수 있는 인간은 없었다. 고향을 향하는 오디세우스도 귀를 밀랍으로 틀어막은 배 위의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그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음악의 근원은 폭력이다. 육신의 숨을 끊은 다음, 창자를 말리거나 힘줄을 잡아당겨 현을 만들고, 가죽을 벗겨 악기의 몸통을 만들었다. 뿔과 기다란 뼈의 골수를 빼내어 비운 뒤에 한쪽을 입에 대고 불어 소리를 내었다. 폭력으로 만든 기구로 인간은 아름다운 소리를 내었다. 아름다운 소리에 인간은 환호하고 슬퍼하며 감정의 폭을 넓혔다. 그러나, 아름다운 소리는 권력자의 감정에 봉사하였고 그것이 클래식의 모태이다. 고통을 견뎌야 할 때, 소리는 우울과 분노를 담았고 그것이 민요와 재즈의 근원이다. 소리는 운명의 예고였다. 새벽 수탉의 소리에, 베드로는 예언받은 대로 세 번 부인했다.
인간의 첫울음은 고통의 소리이다. 따뜻한 모체의 뱃속에서 양수에 떠다니며 엄마의 심장소리 숨소리 그리고 대화하듯 건네는 소리가 사라진다. 달을 채우고 양막이 터지며 세상으로 밀려 나오는 순간, 수중 부유의 느낌은 사라지고 메마르고 차가운 공기가 살갗에 닿는다. 모체의 숨을 통해 공급받던 산소는 폐순환으로 급격히 전환되며 스스로 첫 숨을 내쉬어야 하는 낯섦에 직면한다. 익숙했던, 그리고 보호받던 감각들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순간의 생소함과 두려움이 고통의 소리를 내지르게 한다. 소리를 시작하는 생명의 첫 순간은 고통이다.
소리는 그리고 음악은, 인간의 폭력에 가장 가까이 있었다. 모든 전쟁에 뿔피리 소리, 북소리가 있었다. 병사를 모으는 군악대의 행렬과 사기를 북돋는 군가, 그리고 참호와 폐허의 비참함 위에 흐르던 나직한 음악들.. 그것은 3자의 시선에서 감상적일 수 있겠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처절과 분노였다. 목숨이 오가는 순간에 잘 다듬어진 목소리와 악기들의 선율이라니.. 폐허와 비참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음악은 어째서 그렇게 활용되었던 것일까.. 우리는 그 부조화의 극치를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에서 보게 된다. 수용소 안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은, 나치가 유태인을 조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좀 더 효율적인 관리와 통제를 위해 연주한 것이었다. 그것도 붙잡힌 유태인 음악가들에게 연주와 지휘를 시켜서 말이다. 위로라는 음악의 긍정을 배려하는 줄 알고 명령에 스스럼없이 악기를 연주했던 유태인들은, 그 음악을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던 동료 유태인들 일부의 경멸 어린 시선과 짜증에 깨닫는다. 음악은 그렇게 폭력과 죽음에 가장 적극적으로 복무한 예술이 되었던 것이다.
음악이 소수만의 전유물인 시대는 지난 지 오래되었다. 음악은 저마다의 소리로 엄청난 양으로 만들어지고 있고, 각각의 음악은 복제라는 기술을 통해 무한히 반복되고 퍼져나간다. 닫개가 없어 무방비로 노출된 귀를 향하여 폭풍우와도 같은 음악들이 귀로 쏟아진다. 그 무차별의 폭력에 한 때 음악을 다루던 작가가 사랑에서 혐오로 음악에 대한 시선을 바꾸어버린 것인지 모른다. 음악의 근원과 성정은 폭력이며 음악의 역사 역시 폭력이고 현시대의 음악 또한 폭력임을 이야기한다. 진정한 음악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고독과 은둔 속에서, 고요하게 솟아나는 작은 샘처럼 나타날 것이다. 음악의 부활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진정성에의 새로운 해석인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때 음악을 곁에 두었던 이의 자기성찰적 부정은 진정한 음악을 반어적으로 갈망한다. 신화와 철학을 인용한 해석과 쉽게 이어지지 않는 단락으로 구성된 에세이 형식의 자기성찰은 음악 혐오라는 제목으로 요약된다. 혐오는 진정함을 갈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