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53.

by 전영웅

봄 텃밭 작물들을 심었다. 매운 고추, 안 매운 고추, 꽈리고추 10개씩, 가지 10개, 방울토마토 10개, 깻잎 10개, 애호박 4개, 물외 4개, 오이 4개, 딸기 4개.. 포트에 파종한 바질과 상추와 고수가 자라고 있다. 머릿속 계산상 모두 다 심어도, 텃밭 자리가 모두 다 찰 것 같지 않다. 남는 자리엔 모종 파는 집에 가서 심어보고 싶은 작물을 골라 심으면 될 듯하다. 다행히, 오일장에서 모종을 내다 파는 할머니가 걸어서 다녀올 수 있을 만큼 가까이에 살고 계셨다.

음력 3월 1일이 지나면 텃밭농사를 시작한다. 영등철이 지나며, 괴팍하리만치 심한 바람과 기온의 변덕이 거의 사라지는 시기이다. 우리에겐 음력 3월 1일이라는 달력상의 날짜도 중요하지만, 농사 시기를 정확에 가까이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바로 옆집 할머니이다. 우리 집 바로 옆의 땅에, 내가 마당에 만들어 놓은 텃밭의 7-8배는 족히 되는 넓은 텃밭을 일 년 내내 혼자 가꾸신다. 내게는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농사의 신 격인데, 할머니가 어느 날 무언가를 심으면 ‘아, 이 시기에 저 작물을 심는 거구나.’ 배우게 된다. 봄 텃밭도 마찬가지였다. 음력 3월 1일이라는 기준을 모르고 지낼 때에는 할머니가 언제 고추 모종을 심으시나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할머니의 텃밭에 고추와 갖가지 모종들이 심어지면, ‘때가 되었구나!’ 깨닫고 모종을 사다 텃밭에 심었었다. 우연히 할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음력 3월 1일도 알게 되었다.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바쁘게 집과 병원을 오가고 있는데, 출근하는 어느 날 아침 할머니의 텃밭에 고추가 심어져 있었다. 날짜를 가늠해보니 음력 3월 1일이 이틀 정도 지나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모종들을 사다 달라 부탁했고, 주말이 되어 몇 주 전 미리 만들어 놓은 이랑에 심었다. 며칠 전 많은 양의 비가 내려 땅 속은 넉넉하게 수분을 머금고 있었다. 호미로 이랑을 조심스레 파서 공간을 만들고 포트에서 모종을 뽑아 공간에 뿌리를 넣고 흙을 잘 덮어 주었다. 간격은 40-50센티미터, 물을 넉넉하게 뿌려주었다.

텃밭농사는 하면 할수록 호기심은 줄어들고 차분한 고민이 늘어난다. 이전에는 고추, 토마토 이외 심어보고 싶은 아무 작물들이나 막 심었는데, 이제는 가장 잘 되는 작물 위주로 심은 다음 주변을 돌아보고 여건상 잘 자랄 것 같은 작물들을 추가로 심는다. 고추와 토마토와 가지, 호박, 오이는 우선적으로 심는다. 이들은 기본적인 관리만 잘 해 주어도 넉넉하게 결실을 맺어주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추는 매운 것과 안 매운 것, 꽈리고추 등의 종류를 나누어 심기 시작했다. 토마토는 빠르고 무성하게 자라는 작물이라 손이 좀 가는 편인 데다가, 방제를 해 주지 않으면 사람이 먹기 전에 벌레들이 먼저 먹어치운다. 그래서, 나같이 게으른 농부는 일반 토마토보다 체리 토마토나 방울토마토를 선호한다. 열매의 양이 많고 알이 작은 만큼 빨리 자라, 벌레에게 양보하고도 사람이 먹을 양이 넉넉하게 생기기 때문이다. 가지나 호박 오이 역시 밑순 잘 따주고, 그물망만 해 놓으면 알아서 자라며 결실을 맺는 것들이다. 그 외, 제주라는 환경에서는 물외를 많이 심고 서리태 콩도 많이 심는다. 우선 잘 되기 때문이다. 딸기도 심어볼 만하다. 딸기는 올해 처음으로 심어 보는 작물이다. 제주에서는 하우스가 아닌 노지에서도 딸기가 재배되는 특성을 고려했다. 텃밭 옆 통로로 놓아둔 공터가 잡초에 뒤덮이는 것이 귀찮아서, 그곳에 딸기밭을 만들었다. 옆자리로 줄기를 뻗어 번식하는 딸기의 특성을 활용해서 공터에 딸기가 퍼지게끔 유도할 생각이다. 딸기가 열리면 흙에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비닐 멀칭까지 했다. 우리 텃밭에는 비닐류 사용을 최소화하자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데, 딸기만큼은 이 원칙에서 제외시켰다. 아무래도 잡초와의 전쟁과 딸기 수확의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텃밭에 함께 심는 허브로는 바질과 고수를 선택했다. 여러 종류의 바질 씨앗을 구해 파종해 보았었다. 거의 되지 않았고, 레몬 바질, 타이 바질, 부쉬 바질 등등이 잘 자라긴 했는데, 우리가 먹기에는 역시 스위트바질 만한 것이 없었다. 따라서 스위트바질을 따로 포트에 파종해서 싹을 내고 있고, 좀 더 자라면 텃밭 이랑에 옮겨 심을 생각이다. 고수는 월동을 하며 여기저기 퍼지는 허브라, 따로 파종하고 그러지 않아도 마당 곳곳에서 올라오긴 한다. 그래도 작물 대접을 해서, 작년에 거두어 둔 씨앗을 파종해서 싹을 내고 있다. 그 외, 오레가노, 세이지 등의 허브들을 열심히 파종해 보았지만 실패했다. 허브류는 주로 마당 관상 및 식용으로 활용하는데, 주로 식용으로는 스위트바질과 고수만 텃밭의 한 이랑을 채우게 하고 있다.

올해 기대되는 작물 중 하나는 애호박이다. 집 입구 쪽으로 집이 들어서면서 돌담이 생겼다. 그 자리에 경계수로 심어 있었던 로즈마리 덤불은 너무 커져 텃밭 공간을 많이 차지해서 올해 이른 봄에 덤불을 모두 걷어내었다. 그리고, 로즈마리가 있던 자리 돌담 아래로 호박을 심었다. 이전에 호박은 마땅히 심을 자리가 없어 배수로가 있는 집 뒤뜰 경계로 심었었는데, 성장도 더디고 버거워 보였다. 로즈마리 덤불을 걷어내면서 내 마음엔 이미 호박이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돌담을 타고 잎을 키우며 호박이 달리는 상상을 해보면 벌써부터 기분이 좋아진다.

완두가 익어가고 있고, 이를 거두고 나면 서리태 콩을 심을 생각이다. 두 이랑을 차지하며 자라고 있는 양파를 걷어내면 6월 즈음에 고구마도 심을 것이다. 일차로 모종들을 심고 남은 자리까지 앞으로 심을 작물들을 계산해도 한 두 이랑이 남았다. 아내와 상의하여 무얼 심을까 고민 중이다. 모종 파는 할머니네 집에 찾아가 가지고 있는 모종들 중 심어볼 만한 것들을 고를 것이다. 아내는 벌써 피망을 생각하고 있었다. 남는 이랑은 흔적같이 남은 호기심에 할애를 해도 좋으련만, 나는 피망에 다시 고민을 얹고 있었다. 땅의 특성 때문인지, 잘 되는 작물들과 안 되는 작물들이 확연하게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옆집 할머니네 텃밭과 우리 텃밭에서는 우선 마늘이 잘 되지 않는다. 양파도 마찬가지인 듯하다. 감자도 심어 보면 알이 작게 나온다. 그렇지만, 고구마는 참 잘 된다. 피망도 심어 본 적이 있다. 방제를 안 한 탓도 있었겠지만, 하나도 열지 못한 채 반년을 자리했었다. 다시 심어 보면 좀 다른 결과가 나올까 생각도 해 보지만, 괜히 고민스럽다. 여유를 좀 가져야겠다. 가장 기본적이면서 무난하고 잘 되는 작물들은 넉넉하게 심었으니, 남는 자리엔 고민 없이 호기심을 얹어보아야겠다. 피망, 파프리카, 또 무엇이 좋을까.. 3년을 생각하고 더덕이나 아스파라거스를 심어볼까? 점점 더워지는 봄볕만큼 나의 만족과 기대도 오르고 있다. 마당에 묶인 반려견 라이 녀석은 그만큼 답답해질 것이다. 주변에 시작하는 텃밭도 많아지고, 곳곳에 제초제도 뿌려대니 함부로 풀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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