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rr Kwak Dec 20. 2023

떠날 결심. 그때 내 나이 32. 간다 독일로.

워킹홀리데이 막차로 1년짜리 비자 들고 독일로 떠나다.



2016년 9월. 정확히는 9월 4일. 내 생애 결코 잊을 수 없는 숫자. 잊을 수 없는 날짜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고, 그렇게 내 삶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안갯속으로, 불안하고 긴장되긴 하지만 적당한 흥분과 설렘과 함께 나는 인천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 이야기는 2016년 4월부터 9월 사이의 이야기이다. 이 짧은 5개월 동안 내 인생은 급격하게 변했다. 총각에서 유부남으로, 5년 차 직장인, 2년 차 대리에서 백수로의 대전환기였다. 그리고 그 시작은 와이프, 아니 그 당시 여자친구와의 대화에서 시작한다.


"나 진짜로 독일 나가고 싶어. 곧 회사 사표 내고 준비할 거야."


와이프가 독일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었고, 꾸준히 일주일에 한 번씩 독일어 학원에도 다니며 독일어 공부를 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사실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늘 그래왔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심 '저러다 말겠지'라고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그녀의 결심은 나의 결심보다 훨씬 단단했다. 설득의 이유도, 명분도 없었지만 결국 설득을 포기한 나는 중대한 결정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녀와 헤어지느냐, 아니면 함께 독일로 떠나느냐. 제3의 선택지, 다시 말해 한국에 함께 남느냐라는 선택지는 사라지고 말았다. 


다시 말해 선택의 공은 나에게로 돌아왔다. 그녀가 쏘아 올린 공이 나에게로 넘어온 것이다. 사실 지금 와서 고백하면 많이 흔들렸다. 지금까지 해오던 것들은 놓고 아무것도 없는 해외로 떠난다는 것은 너무나도 큰 결정이었고, 너무나도 큰 도전이었다. 하지만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해외 생황에서 오는 어려운들에 대한 인지가 크게 없었던 나였으니까.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결정이었을 그 결정을 어쩌면 너무도 쉽게 내렸다. 하지만 너무나 큰 고민 속에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지금도 종종 독일에서 누군가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누가 먼저 독일로 나오자고 한 거예요?"라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늘 이야기의 말미에 덧붙인다.


"... 하지만 제가 선택한 제 결정입니다."


그녀의 제안이었지만, 결국 선택은 나였고, 결정도 나였고, 그 선택과 결정의 책임은 나에게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그 선택지 가운데 함께 독일로 떠난다는 선택지를 택하게 되었다. 


"YES. 까짓것, 함께 나가보지 뭐!!"


물론 어려움도 많았고, 소위 현타도 많이 받았지만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현재까지는 말이다.


그렇게 결정을 한 후, 나와 여자친구의 앞에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많은 숙제들이 있었다. 우선 양가 어른들에게 허락. 나이 30에 허락을 받는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부모님께 이야기를 하고 허락을 구하고, 이해를 구하고, 우리의 선택을 인정받아야 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결국 양가 부모님들께서는 승낙을 해주셨다. 단, 한 가지 조건이 붙었다. 


"대신 결혼하고 나가거라."


그렇게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남들은 결혼준비를 하면서 많이도 싸우고 심지어 갈라서기도 한다는데 우리에게는 싸울 시간도 없었다. 5월 상견례, 6월 결혼식, 9월 출국. 5개월간의 싸움이었다. 특히 5월부터 6월까지 약 2달간은 전쟁이었다. 신혼집을 마련해도 되지 않았기에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결혼을 위해서 해야 할 일들은 왜 이리도 많던지.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때문에 가족들에게, 친구들에게, 많은 지인들에게 실망 아닌 실망을 많이 안기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는 너무나 큰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결혼을 했고, 부부가 되었고, 2016년 9월 4일. 독일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수중에는 1만 유로 정도의 현금. 한국 통장에는 5년간 일하면서 모아놓은 종잣돈. 2개월의 어학원 기숙사 예약이 전부였다. 그렇게 우리는 떠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지인들이 말리기도 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그렇게 갑자기 여자 따라서 해외로 나가는 게 말이 되냐고. 신중하게 결정하라고. 물론 걱정이 되기도 하고, 염려스러운 마음에서 한 말들이겠지만 적지 않은 스트레스였다. 나조차도 흔들리고 걱정되고 긴장되는 그 시간들 앞에서 들려오는 주변의 안 좋은 소리들. 


하지만, 몇 번이고 강조를 하지만 내 결정이었다. 단순히 여자를 따라 해외로 떠나는 그 큰 결정을 한 것이 아니다. 안일하기도 했지만, 많은 그림을 그려보았고,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고, 당시의 내게 최선의 결정을 한 것이다. 그렇게 내 결정 속에서 나는 떠났고, 나는 독일에 살고 있고, 앞으로도 꽤나 오랜 시간을 더 독일에서 살게 될 것이다. 독일행을 결정하면서 물론 잃은 것들도 많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얻었고, 성장했고, 발전했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 그렇게 앞으로도 많은 것을 잃을 것이고, 또 성장하고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나는 계속해서 단단해질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에필로그. 해고통지를 받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