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nnel factor
한 사람은 90킬로 가까웠고, 또 한 사람은 85킬로였다. 고등학교 때 짝궁이었던 친구와 내 이야기이다. 2019년초 건강검진 후(매년 듣는 이야기였지만) 의사는 무조건 살을 빼라고 했다. 어떤 의사는 왜 내게 살을 빼지 않느냐고 짜증을 내는 경우도 있었다. ㅠㅠ. 살 빼는 게 쉬우면 왜 다이어트 산업이 있겠는가...
미국의 통계를 본 적이 있었는데, 지난 수십 년 동안 다이어트 산업에 사람들이 쏟아붓는 돈은 엄청 늘어갔지만, 평균 체중도 점차 늘어갔다.
사회심리학의 아버지로 흔히 불리는 쿠르트 레빈(Kurt Lewin)은 '경로요인(channel factor)'이라는 중요한 개념을 소개했는데, 쉽게 말해서 행동의 촉매제와 같은 것이다. 대학생을 대상으로 파상풍 예방접종이 중요하다고 설명을 열심히 해봐야 실제 접종을 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한 실험에서는 3%였다). 하지만, 이들에게 접종을 맞을 수 있는 곳을 지도에 동그라미로 표시해주면서 언제 맞을 수 있는지 구체적 시간을 물어보면, 접종률은 무려 9배가 넘게 늘어난다. 경로 요인을 적절하게 사용해서 행동 변화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살을 빼려고 노력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그런데 올 한 해 친구는 거의 10킬로그램, 나는 5킬로그램을 빼서 둘 다 지금은 80킬로 정도이다. (물론 건강을 위해서 아직 더 빼야 한다:) 친구와 나는 몇 년 전부터 여러 실험을 해봤는데, 가장 효과적이었던 것은 올해의 실험이었다. 카톡을 이용하여 하루 4가지를 서로 주고받는다. 아침, 점심, 저녁 먹은 것(식사와 간식, 음료 포함)과 그날 걸은 걸음수.
묘한 것이 나는 오늘 2천 보도 못 걸었는데, 상대방이 1만 5 천보쯤 걸어주게 되면, 그다음 날 나 역시 * 팔려서 더 걷게 된다. 나는 튀김을 먹었는데, 상대방이 샐러드 먹었다고 카톡이 오면 그다음 날 좀 더 조심하게 된다:)
그랬던 친구와 처음으로 같이 비행기 타고 대만 여행을 왔다. 도착한 다음날 아침 우리의 목표는 3만 보를 같이 걷는 것이었다. 왜 3만 보냐고? 서울에서 함께 2만 몇 천보를 걸어보기는 했지만 3만 보는 걸어보지 못했고, 영화배우 하정우가 매일 평균 걷는 걸음수가 3만 보라길래 도대체 어느 정도인지 한 번 걸어보고 싶었다. 호텔에서 받은 지도에 타이페이 도시를 한 바뀌 도는 일정을 표시한 뒤, 걷고, 보고, 걷고, 먹고를 반복했다.
딘타이펑 본점에서 대기표를 받고는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걸어 다니기도 했는데 아침에 나가 저녁에 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 걸음수가 2만 8천보, 둘 다 지치고 발이 아파서 "도대체 하정우는 어떻게 매일 3만보를 걷는다는 거야!"라고 투덜대면서 나머지 2천 보를 채우기 위해 다시 호텔 주변을 돌았다. 3만 보가 되었을 때 둘이 악수를 하고 사진도 찍었다. 3만 보는 내게 무려 4시간 동안 22킬로를 걸어야 하는 여정이었다. 평상시에 하루 4시간을 걸을 수 있을까? 물론 내게는 힘들 것이다. 하루 90분씩 1만 보라도 꾸준히 걸을 수 있기를. 호텔 로비에 도착해서는 그는 사이다를 나는 위스키 한 잔을 들이켜고는 각자 방으로 가서 씻고 잠들었다.
새로운 아침. 오늘은 한 나절 동안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는 박물관으로 갔고, 나는 호텔방에서 잠시 쉬면서 타이페이의 서점에서 산 책을 읽다가 이 글을 썼다. 이제 다시 타이페이 시내를 걸으러 나가 봐야겠다. 고등학교 때 매일 장난치던 짝꿍과 어제 걸었던 3만 보는 두고두고 잊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