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2 'The Joshua Tree' Tour 2019 서울 공연
멋진 록밴드야 레드 제플린과 딥퍼플, 크림과 블랙 사바스를 지나 핑크플로이드와 데프레퍼드와 건스앤로지즈까지 100팀이라도 리스트를 적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팀을 꼽으라면, 나에게는 U2다. 록음악이 최고 관심사여서 용돈 모아 LP 사들이느라 정신없던 중학생 시절 우연히 만난 앨범 <Unforgettable Fire>는 U2에 대한 나의 긴 사랑의 시작이었다.
1976년 결성된 이 패기 넘치는 신인 밴드가 인기 얻는 것을 봤고 라이브에이드의 공연도 목격했으며 진부함을 이겨내기 위해 새로운 모험에 도전하는 모습, 반전운동과 인권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습, 전 세계 최고 관객을 동원하는 밴드가 되는 장면, 40년 넘는 동안 멤버 변경 없이 계속해서 음반을 내고 공연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동안 발매한 모든 앨범이 처음에는 LP로 이후에는 CD로 나의 음반 콜렉션에서 ABC 순의 배열을 벗어나 별도의 자리를 잡고 있는 밴드. 한 마디로, 강한 심정적 연대를 바탕으로 ‘같이 나이 들어가는’ 동세대 밴드였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순간 갑자기 소원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열다섯 살 때부터 좋아해온 밴드 U2의 한국 공연은 이런저런 소문으로 등장했다 무산되기를 반복했고 이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다 나이 드느니 차라리 해외투어를 따라가서 보고야 말겠다고 2019년 투어 일정을 확인하던 중이었다. 그래서 <Joshua Tree 2019>의 공연지에 서울이 들어있다는 공식 정보가 뜨는 순간 조금 허무해졌다. 뭐야, 왜 이러는 거야, 휴가 아니면 사표라도 내고 갈 거였는데 왜 서울이래. U2 내한공연보다 한반도 통일이 더 빠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뭐 이런 일이 다 있담.
글로벌 팬클럽 회원들은 선예매를 할 수 있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이트가 열리자마자 접속. 워크숍 때문에 외부에 있던 H와 전화까지 해가며 난리 쳤는데 계속 튕겨나가더니 간신히 지정석 예매에 성공했다. 나중에 들으니 이런 거 할 때는 집에서 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 사양 좋고 속도 빵빵한 pc방 가서 해야 하는 거라고... 이렇게 자리를 구한 것이 6월이었는데, 그때는 공연날인 12월이 안 올 줄 알았다. 그 사이에 무슨 천재지변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메탈리카는 해외투어 하다가 제임스 햇필드가 마약 때문에 정신 못 차려서 투어 접고 재활원 들어갔다는 소문이 돌아서 불안불안. 그래도 그 날은 왔다.
U2의 대표 음반인 <The Joshua Tree> 발매 30주년을 기념하는 월드투어의 서울 공연은 12월 7일 고척 스카이돔. 돔 투어나 스타디엄 투어나 아레나 투어를 유치할 수 있는 음향 시설 좋은 장소를 찾기 어려운 한국에서 그나마 많은 관객을 불러 공연을 할 수 있는 곳은 이곳 정도? 내 또래의 인생 밴드인 덕에 관객의 평균 연령은.... 꽤 높아 보였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그동안 기다려온 U2를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는 감격 때문에 모두가 서로의 친구가 될 수 있는 분위기였다. Zoorapa 투어, Vertigo 투어, 360투어 등 U2의 투어는 엄청난 스케일과 새로운 연출로 단순한 음악 공연 이상의 경험을 선사하는 가운데 이번 투어는 가로 61m, 세로 14m의 초대형 스크린이 똭! 'Sunday Bloody Sunday'로 시작하는데, 돔 양쪽에 자리한 보조 전광판을 사용하지 않아서 왜 그럴까 싶었다. 물론 몇 곡이 이어지며 이 의문은 풀렸다. 배경이 된 거대한 스크린만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처음 몇 곡에서는 조금 불안하던 보노는 금세 컨디션을 찾아 멋지게 노래했고 U2 음악의 전체 분위기를 책임지는 디 에지의 기타는 현장에서 들으니 감동 그 자체. 애덤 클레이튼은 늘 멋지고 레리 멀랜은 ‘서울’을 티셔츠에 쓰고 나와 미친 듯 드럼을 두드렸다. 공연이 열린 12월 7일은 존 레논이 총격으로 사망한 날이었다. U2의 대표곡 중 하나인 'Pride(In the Name of Love)'는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바친 노래였지만 이날은 존 레논에게 바쳐졌다. 공연 동안 Stand by Me, She love you, Love me do, all you need is love 등의 비틀즈 노래가 스니펫으로 중간중간 등장했다.
초기 앨범의 노래 몇 곡을 부르고, Where the street has no name,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 With or without you 등으로 시작해 <조슈아 트리> 앨범 전체 곡을 부르고 이후 앨범에 실린 곡들을 몇 곡 더 불렀는데, 14장 앨범에서 25곡을 선정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노래건 다 좋아하는 곡들이어서 셋리스트에 별 불만 없었어요!
각각의 앨범이 발매되던 때의 추억이 떠올라 매 곡마다 감격했지만 가장 울컥했던 것은 Ultra Violet이 나오며 세상을 바꾼 여성운동가들의 모습이 'HERSTORY'라는 단어와 함께 스크린에 펼쳐지던 순간이었다. 직전 일본 공연에서도 이토 시오리 등 일본의 여성운동가를 소개해주었기에 살짝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비행사 박경원, 나혜석 화가, 이태영 변호사,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해녀, 서지현 검사의 모습이 보였다. 설리의 모습이 등장할 때에는 객석이 잠시 조용했다. 이날 공연에 참석한 여성 관객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하고 공부하고 일하고 원하는 사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까지 먼 길을 왔지만 여전히 가야 할 길이 먼 듯한 느낌을 받는 요즘이라 더 그랬을 것이다. 멀리 왔고 더 멀리 가야 하지만 절대 돌아가지는 않을 것임을 그 자리에 있던 우리 모두는 알고 있으니까.
노래가 끝날 즈음에는 "우리 모두가 평등해질 때까지 우리 중 누구도 평등하지 않다No one is equal until all of us are equal"이라는 말이 등장했고 기분이 다시 많이 착잡해졌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평상시에는 이런 생각을 잘 못한다. 스스로를 위한 평등에만 관심이 있지 다른 사람을 위한 평등에는 멍한 반응을 보일 뿐이다. 그래서 주기적으로 외부 자극을 통해 정신을 뒤흔들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몸이건 마음이건 녹슬어버릴 뿐이다.
너무나 예상에 맞게, 마지막 곡은 'One'.
통일되고 난 후 판문점 어디쯤에서 이 노래를 듣게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고척 스카이돔에서 듣게 되다니. 타오르던 열기가 조금씩 가라앉으며 2시간 좀 넘는 공연은 끝났다. 내내 평화와 사랑과 이해를 이야기하는 터라 U2를 '꼰대' 혹은 '선생' 혹은 '잘난 척하는 위선자'라고 부르고 싶어질 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가수가 되고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니 노래마다 앨범마다 평화와 사랑과 이해를 외친들 무슨 문제일까 싶다. 다 자기 맘이지. 그래서 그들이 U2인 것일 테니. 한국의 많은 남자 연예인들, 셀럽들은 방송에 나와 ‘침묵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놓고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는데 이렇게 큰 소리로 계속 이야기해주는 가수가 우리에게는 더 필요하다.
아쉬운 것은 오빠들이 조금만 더 빨리 왔으면 나 스탠딩석에서 서서 볼 수 있었는데... 하는 정도? 6시간을 서있기에는 체력이 감당되지 않는 상황인지라.
35년을 기다려온 최애 밴드의 공연은 이렇게 끝났고, 이제 현실로 돌아와야 하고, 오늘부터 롤링스톤즈와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마돈나 공연의 티켓팅을 꿈꾸며 다시 ‘존버’ 상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