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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 Report Jan 18. 2019

실라버스(syllabus) 이야기

살면서 우리는 의도와 상관없이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 이러한 영향을 인식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때도 있다.
1990년대 중반 한 학기 동안 수업을 들었던 수염이 덥수룩하면서 안경 뒷편에서 날카로운 눈매를 보였던, 미국 마켓대(Marquette Univ.)의 ‘닥터 밥(Dr. Bob)’이라 불리던 그리핀(Griffin) 교수님은 나에게 오랫동안 좋은 영향을 준 사람이다. <커뮤니케이션 연구방법론> 수업을 그에게 들었는데, 그는 많은 미국의 사회과학자처럼 양적 연구방법을 주로 사용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질적 분석을 하는 사람이었기에 그의 수업이 그렇게 재미있지 않았다.  


그의 수업에서 내가 매우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있는데, 수업 첫시간에 나누어주는 실라버스(syllabus)이다. 실라버스는 라틴어의 ‘리스트’를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했으며, 강의의 개요를 적은 수업 안내서를 뜻한다. 20페이지를 훌쩍 넘긴 수업안내서는 서로 제각각 다른 칼라의 종이에 인쇄되어 있었다. 한 학생이 왜 흰색 종이가 아닌 여러색깔의 종이에 인쇄하는지 묻자 그는 “내가 색종이를 좋아해서”라고 답했다. 내용은 더욱 나를 압도했는데, 매주 수업에서 다루어야 할 내용과 함께 그 수업에서 생각해봐야 하는 질문, 참고서적 등을 친절하게 나열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안내’하는 문서였다. 다른 수업안내서는 첫주에 보고 어디엔가 처박아 두기 마련이지만, 그리핀 교수의 수업 안내서는 매주 수업을 준비하고 들으면서도 계속 쳐다보게 되는 그야말로 친절한 안내서였고 그가 수업을 위해 미리 얼마나 철저히 준비하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내가 나중 한국에 돌아가 수업을 하게 된다면 다른 것은 몰라도 그의 수업준비 자세를 배워서 실천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 수업안내서는 지금도 내 창고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돌아와 90년대 말부터 대학에서 종종 PR수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핀 교수의 수업 안내서는 내게 영향을 미쳤는데, 내가 만든 수업 안내서 역시 20페이지를 훌쩍 넘었다. 수업 안내서를 그렇게 쓰기 위해서는 학기 시작 전 수업에 대해 많이 준비해야 한다. 이번학기 오랫만에 고려대학교 미디어 학부에서 <PR 사례연구>라는 수업을 진행하면서도 ‘그리핀의 정신’은 내게 큰 영향을 주었다. 선택과목이었고, 금요일 오후라는 매우 ‘취약한’ 수업일정이었지만, 많은 학생들은 자세한 수업 안내서가 자신의 마음(금요일에는 수업을 듣지 않는다는:)을 바꾸게 된 계기였다고 말했다.


지난 9월 시작할 때만 해도 올해 유난히 많았던 출장과 사업일정으로 나에게도 부담스러운 수업이었지만, 한 학기를 마치고 돌아보니 좋은 학생들을 많이 만나고 이야기 나누었던 시간이었다. 과제(자신을 브랜드로 놓고 분석하는 작업)를 하면서 부모님이 원하는 직업을 할까 생각하다가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직업을 하기로 결심했다는 학생, 해외 애니매이션이 한국에 번역되어 소개되는 과정에서 성소수자 캐릭터가 사라진 것에 문제 의식을 갖고 더빙 피디가 되겠다는 학생 들을 보면서 나 역시 가슴이 차오르는 뿌듯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학기 그리핀 교수가 생각이 나 그에게 그가 나에게 지난 20년 동안 어떤 긍정적 영향을 주었는지 메일을 보냈다. 지금은 은퇴한 그는 자신이 나에게 그런 좋은 영향력을 준 것을 알고 기뻐했다. 그가 건강한 노년을 보내기를, 그리고 이번 학기 수업을 진행한 학생들에게도 내가 긍정적 영향을 주었기를 바란다.


https://www.slideshare.net/hohkim/syllabus-2018-fall-korea-univ-pr-case?fbclid=IwAR2oiGTQ2ucsx-QX3GRvaiNdlMprjT_o1Wv2F6f4RFpeVMB-EZoNrXpqE5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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