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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r werld Oct 06. 2022

Reload- 릴리슈슈의 모든 것

좋아하는 고구마가 먹고 싶어지지 않는 텁텁함과 밀려드는 애잔함

  나는 심도 있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후의 잔상이 길게 남아 내 주위에 맴돌며 나를 가라앉히는 기분이 든다


  어제 중국에 도착했다 아직도 이상한 격리 시스템을 운용하며 외국인들을 극한으로 치미는 이곳에서 밀려드는 고됨으로 어제를 보냈다 최대 14일 격리를 예상하며 나만의 알찬 시간을 보내야지라며 세웠던 계획들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싸왔던 과자들을 꺼내먹으며 언니와 형부가 사랑으로 꾹꾹 담아 준 usb를 TV에 연결했다. 영상미나 색감이 예쁜 영화를 좋아하는 걸 아는 언니여서 인지 포스터부터 하나같이 이쁜 영화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이름부터 나에게 지나치게 러블리한 릴리슈슈에서 멈칫했다. 제목에서 오는 어색함에 왓 차(WATCHA)에 영화 제목을 넣어보니 예상 점수가 높았고 역시 언니..를 외치며 침대에 누웠다.


  초록 들판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근데 예쁘다고 말하기도 나를 범죄스럽게 만들어버리는 선한 얼굴의 소년의 뒤로 묘한 음악이 깔리며 타이핑 소리와 글자가 화면을 계속 바쁘게 변화시켰다. 처음엔 예뻤다 화면도 배우들도 그러다 그들의 이지메가 시작되며 뭔가 역겹다는 기분과 영혼마저도 끌려다니는 남자 주인공의 슬픔 가득한 연기를 보고 있자니 끝도 없는 애잔함과 동시에 아 못 보겠다란 생각이 들며 영상을 멈췄다. 다시 왓챠로 돌아와 대체 왜 이 똑똑한 데이터 분석이 오늘따라 나의 예상 점수를 이렇게 많이 준 것인지 다시금 살펴보았다. 이동진 평론가의 극찬도..


  자꾸만 생각나는 주인공의 처진 어깨와 눈빛과 영혼이 나 조차도 처지게 만들자 침대에서 일어나 청소를 시작했다 향을 켜고 어제 하루 동안 쌓인 먼지와 머리카락들을 치우고 미뤘던 식사도 하고 라테도 만들고 자책하며 다 먹어버린 과자 중에 그럼에도 남겨둔 소중한 아이들을 꺼내 먹고 메일함도 열어보고 (사실상 VPN이 있었음에도 카카오와 구글 등은 열어볼 수 없었고 그것이 염려되어 사간 홍콩 유심의 데이터는 턱없이 부족했던 터라 할 게 없었다. 무언가가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다짐해왔던 알찬 격리 생활시간표에 미안하게도 말이다..


  희한하게 무슨 마음에서인지 다시 침대 안으로 들어가 재생 버튼을 눌렀고 첫 장면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 여기의 십 대들은 하나같이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 아픔이나 두려움이나 슬픔이 너무 커 온전함을 받아들이기도 힘들다 그 누구 하나 행복하게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싶다 갑자기 나의 학창 시절도 떠올려보았다 나는 저 정도는 아니었지만 시디플레이어에 시디를 넣고 나만의 감성과 나만의 세계를 구축했던 그 세계만큼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들이 떠난 오키나와 여행의 영상도 그곳에서의 일들도 그곳을 떠나 온 다음부터의 소년의 말처럼 시작된 모든 잿빛들의 일들이 더욱 애잔해졌다 마지막 소녀의 죽음도 소년의 죽음도 소년이 사랑했던 소녀가 받게 될 상처도 모두 끝까지 무거웠다 그들이 좋아한 릴리 슈슈와 에테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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