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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윰 Dec 30. 2019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

<논어>를 다시 읽으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할까 걱정하라.'


<논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 하나다. (실천을 못 하고 살 뿐이지)


19년을 고작 열흘 남짓 남긴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올해 새로 알게 된 사람들을 헤아려 봤다. 긴 시간이 필요치는 않더라. 엑사를 통해 알게 된 ㄷㅂ, ㅈㅇ, 그리고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ㅁㅎ, ㅁㅈ, ㅈㄴ가 전부인듯 하니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다섯 명이라니. 설령 그밖에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인연을 더한다 해도 아마 두 손가락을 넘기진 못할 것이다. 물론 인간관계의 질을 정량적으로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한 해 동안 나를 스쳐간 사람들의 수를 염두에 둘 때 다섯 명이 퍽 적은 숫자임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다행히도--아니, 애석하게도--난 그 원인을 잘 알고 있다. 이유는 다름아닌 나의 교만함, 그것도 아주 어줍잖은 교만함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난 스무살 이래 내가 깨우친 세계만이 진리에 가깝다는 편협한 신념 내지는 확신, 그리고 그 세계에 대한 자기애적 판타지 속에서 하염없이 교만을 먹고 자라왔다. 이같은 자기 철학에 대한 확신은 해가 갈수록 사그라들긴 커녕 더 단단해져 갔으며, 이내 딱딱하게 굳어버린 나의 뇌와 더불어 사람보는 눈도 졸목이 된 것이다. 내 안에 구축된 작은 세계를 근거로 타인의 세계를 금새 재단하고 심사하여 그들과의 교류 가능성을 일찍이 점쳐보곤 마음을 열지 말지 결정하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교만하고 오만한 처사라니. <논어>의 저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나의 오만함으로 인해 놓친 수많은 인연이 스쳐지나간다.




오래전, 유튜브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키워드는 확증편향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시청자의 기호를 분석하여 그에 맞는 채널만 추천해주는 유튜브 서비스는 시청자들의 신념을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발달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보수 성향의 채널을 주로 시청하는 사람들에겐 계속 보수 성향 채널만 추천될 것이며, 또 반대로 진보 성향 채널을 주로 구독하는 시청자에겐 진보 성향 채널만 추천된다는 분석이다. 따라서 기사는 유튜브를 오래 시청하는 사람일수록 균형잡힌 사고를 할 가능성이 줄어들며, 자신과 다른 성향을 가진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바가 '유튜브의 채널 추천 알고리즘 및 미디어가 인간 심리에 끼치는 영향'은 아니므로, 관련 내용의 타당성 여부를 검증하는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두자. 다만, 확증편향 사례를 인간 관계에도 그대로 적용해보기로 하자.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은 아무렴 가치관이 잘 안 맞는다고 쉽게 관계를 끊기가 힘들다. 아무래도 뜨거운 추억 앞에선 제 아무리 단단한 신념이라도 얄팍해지기 십상인가 보다. 하지만 어느정도 신념이 자리잡힌 성인 이후의 관계--대체로 이해관계로 얽히는 일이 많다--는 얘기가 다르다. 상호 간에 추억은 부재하되 각자의 신념은 혼재하는 이같은 관계에서는 너무 다른 신념을 갖고 있는 두 사람이 친해지는 일이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 내가 성인 이후 친해졌던 사람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하나는 편했던 사람이고, 또 하나는 존경스러운 사람들이다. 전자는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갖고 있었기에 함께 있는 시간이 안온하게 여겨졌던 이들이고, 후자는 내가 추구하는 특정 가치를 열심히 가꾼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통해 난 좁아졌을까, 깊어졌을까.




물론 편한 사람과 존경스러운 사람, 둘 모두 삶의 풍요로움을 위해 꼭 필요한 이들이다. 전자는 우리에게 쉴만한 물가이자, 마음의 안식처가 될 것이며, 또 후자를 통해 우린 노력과 극복의 가치를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지적 세계의 순수한 확장을 바라는 이들이 친해져야 할 대상은 편한 사람도, 존경스러운 사람도 아니다. 우리의 세계관 확장에 진정으로 기여하는 이들은 미처 내가 발견하지 못한 가치를 조망해주는 일종의 돌연변이 같은 사람이다. 이른바 '나'의 세계에 새로운 시선을 가져다줄 수 있는 이단아 말이다. 그들에게 돌연변이나 이단아 등의 호칭이 꽤 적절한 까닭은 우리가 각자 살아가고 감각하는 개별적 세계의 세계관에서 그들이 도무지 낯설고도 낯선 존재이기 때문이다. 또한 현실 세계에서 조우하더라도 그냥 흘려보내고 싶을 만큼 반갑지 않은 손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낯설고 생소한 인상 탓에 우리의 온 세포 하나하나가 그들과 친해지길 필사적으로 거절할지라도, 우리는 그 돌연변이들을 초대해야만 한다. 그렇지않고선, 좁고 깊은 익숙한 세계에서 끝없이 위아래만 쳐다보는 졸목을 면치 못할테니 말이다. 그러니 새로운 시선을 가져다 줄 낯선이를 만홀히 여겼던 그간의 오만을 참회하며, 앞으로 또 남을 알아보지 못할까 두려운 마음을 잊지 않기로.




대학을 떠난 내년엔 또 어떤 새로운 인연을 만날지,,


겸손한 마음으로 기대하며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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