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묵시록

<더로드>, 코맥 맥카시

by 혜윰

320 페이지의 절망, 그리고 단 한 줄의 가장 아름다운 희망'


책을 덮고 나서야, 표지에 적혀 있는 위의 문구가 묵직하게 와 닿았다. 원인 모를 이유로 멸망한 지구에 남아, 희망(혹은 절망)을 찾아 떠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더로드>는 남자와 소년이 하루하루 절망에 직면하는 모습을 절절하게 그려낸다. 바라기는 남쪽 땅이라는 희망을 찾아 떠난 여정이지만, 냉혹한 현실은 '희망 없음'을 발견하는 나날의 연속이다. 바다마저 잿빛으로 채색된 채 순진한 남자와 소년에게 희망이 박살났음을 태연히 알리지만, 남자는 다시금 삶 자체를 희망한다. 어쩌면, 남자의 희망엔 애초에 근거 따위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희망을 품은 남자에게 따뜻한 남쪽도, 바다도 그저 핑계일 뿐, 실은 절망하고 싶지 않은 의지가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있는 건 아닐까. 절망은 희망이 없을 때 스르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남자는 여정 내내 '희망 없음'을 목도하고도 절망하지 않는다. 또한, 마침내 바다가 희망이 아니었음을 보고도 그간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희망은 과연 환상일까?


잿빛 세상의 인간상을 보면서 홉스(Thomas Hobbes)의 <리바이어던>이 떠올랐다.



"인간의 자연상태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이며, 이런 상황에선 각각의 사람들은 오로지 그 자신의 이성에 의해서만 통치되며, 자신의 생명을 그 적들로부터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선 그가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서 이용할 수 없는 것, 이용해서 안 되는 것은 없다."

- 홉스 <리바이어던 > 中 -




사회계약론에 입각해서 국가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홉스는 흥미롭게도 국가 존재의 필요성을 증명하기 위해 국가가 없는 자연 상태를 상정하는 흥미로운 사유실험을 전개한다. 쉽게 말해, 국가가 없는 자연 상태의 야만성과 두려움, 그리고 그것이 야기할 불행을 드러냄으로써 문명상태의 안정성을 증명하고, 나아가 국가의 필요성을 관철하고자 한 것이다. (정치 철학적인 논의를 떠나, 홉스가 상상한 자연상태의 불안정성에 대해서만 생각해보자.)



남자와 소년이 밟은 땅은 홉스가 사유했던 인간의 자연상태에 제법 가까운 듯 하다. 잿빛 세상 속엔 더 이상 국가도, 법도, 질서도 없다. 아울러 살아야 할 '이유'는 아스라이 자취를 감추며, 살아내고픈 '의지'만 빳빳이 고개를 든다. 이유 잃은 의지만 드글드글한 잿빛 세상에 이윽고 홉스가 제창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가 선포된 것이다. 그곳 세상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은 자신의 '의지'를 실현하고자 타인의 '의지'를 꺾어내는 것을 승리로 간주한다. 이런 맥락에서, 어쩌면 인간이 주창하던 '인간다움'이란 가치도 그저 공동체의 존속을 꾀하고자 합의된 허울뿐인 가치에 지나진 않았을까. 규칙이란 모름지기 구성원들이 준수하기로 약속할 때 의미를 가지는 법이다. 경기 규칙 자체에 딴지를 거는 사람과 스포츠 게임을 진행할 순 없듯이 말이다. 더이상 '인간다움'을 외칠 권위자도, 국가도, 법도 존재하지 않는 잿빛 세상에는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개의 규칙이 존재할 뿐이며, 선과 악의 기준은 100명의 마음 속에 낱낱으로 존재한다.



합의된, 혹은 학습된 인간다움이 권위를 잃었을 때야말로 비로소 진정 '인간다움'에 대한 내면의 고민이 시작된다. 규칙 없는 잿빛 세계에서 남자는 소년을 절대 선의 기준으로 삼았다. 소년을 위해서라면 살인도 서슴지 않을 용의가 그득해 보이는 남자에게 있어 인간다움이란 언뜻 아들을 위한 사랑에서, 또한 소년의 인간다움은 타락한 인간상에 대한 두려움에서 일면 드러나는 듯 하다. 그런데 자꾸만 소년은 남자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좋은 사람들인가요?"

남자는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또한, 스스로 답을 찾아야 했다.주변에 그 누구도 '좋은'사람이 무엇인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소년의 질문과, 남자의 고민이 있을 뿐이다. 남자는 그 모든 세상의 기준과 잣대로부터 자유한 채, 본인의 냉철한 이성과 감성만이 자리한 심판대에서 소년의 질문을 받고 당당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 볼 수 있었을까. <더로드>를 읽으며, 소설 속 잔인한 인간상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아 슬펐다. 자신의 '의지'를 위해 타인의 '의지'를 쉽사리 도려내는 악당들은 우리가 발붙인 세상에도 이미 차고 넘친다. 심지어 그들의 눈이 당당해 보이기까지 한 것은 소년의 질문이 이 사회에 너무 부족한 것은 아닐까.



*마르틴 부버 식대로라면, 삶의 '의지'는 삶의 '이유'와 짝말이 아닐까 싶다. 소년의 질문이 이 사회 깊숙이 관통하길 바라며, 또한 질문에 대답하는 우리 가슴 속에 삶의 의지와 이유가 거룩히 결합하기를 소망한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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