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을 위한 지독한 해체

<인형의 집>, 헨리크 입센

by 혜윰


안타깝게도 <인형의 집>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들은 노라의 마지막 행보를 통해 고작 주체적 여성상을 감상하고 그치는 데 이 작품을 소비하고 만다. 필자는 설령 그것이 <인형의 집>을 완성한 헨리크 입센이 의도했던 전부라 할지라도, 140년이나 지난 옛 작품을 대하는 현대인이라면 그 이상의 것을 발견하려는 자세가 좀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물론 작품이 쓰여진 당시 시대상을 검토해볼 때 작중 남자 주인공 헬메르는 남성 중심 사회에 만연했던 가부장제를 대변함과 동시에 노라는 가부장제에 길들여진 수동적 여성상을 나타낸다는 전통적인 분석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즉 가부장제가 부여한 역할 규범을 해체하고자 ‘인형’이길 거부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아 ‘집’을 떠나는 노라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자아 탐구 여행에 깊이 감명 받은 대다수 독자들의 감상에 재를 뿌릴 의도가 없음을 밝혀두는 바다. 다만, 그러한 감상은 헬메르와 노라라는 인물을 남과 여로만 보려는 편협한 시각에서 비롯된 한계가 아닐까 반문하고자 하는 것이다. 필자는 헬메르와 노라는 각각 남과 여를 넘어 ‘구조’와 ‘구조 아래 포획된 개인’을 대변한다고 보았다. 즉 사회 규범을 자연스레 내면화 당한 연약한 개인이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성찰하고 회의함으로써 진정한 자아를 찾아갈 기회를 확보한다는 통찰이야말로 <인형의 집>이 작금의 현대 사회에 전달하는 통렬한 메시지가 아닐까. 보다 자세한 논의에 앞서 작품의 내용을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희곡 <인형의 집>은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1878년 발표한 작품으로 후대 비평가들로부터 최초의 페미니즘 희곡이라 평가받고 있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 노라는 남편 헬메르를 비롯하여 자식들을 살뜰히 챙기며 시종일관 가족에 대한 헌신을 보인다. 심지어는 병환이 짙은 남편을 구하기 위해 큰 돈이 필요해지자 이를 마련할 목적으로 남편 몰래 허위 서명을 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노라를 헬메르 또한 무척이나 사랑(?)하여 ‘나의 어여쁜 종달새여, 나를 위해 노래하는 종달새여’라고 부르곤 한다. 노라는 남편 헬메르를 부단히 내조하며 무탈한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헬메르는 과거 노라가 허위 서명을 통해 남에게 돈을 빌린 사실을 알게 되고 헬메르는 이를 매우 수치스럽게 여긴다. 노라는 자신의 과거 소행이 남편을 살리고자 저지른 실수였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이를 책임지고 노라를 지켜주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명예가 실추된 것에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보고 그간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자성 끝에 노라는 자신의 존재 의의가 가족을 부양하는 데 그쳤음을 깨닫고 본인 삶의 주체성을 찾고자 집을 떠나며 작품은 막을 내린다.



노라의 내적 충격은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 확고히 믿어왔던 바가 힘없이 붕괴됨으로 발생한다. 남편을 위해, 혹은 자식을 위해 살아가며 아내와 어머니라는 역할 규범만이 본인의 존재적 본질이라 믿어왔던 노라는 그들에게 들이닥친 갈등을 마주하는 남편의 태도를 통해 본질을 부정 당하는 경험을 한다. 노라의 충격은 아래 대사에 고스란히 담긴다.



나는 그렇게 아빠 손에 당신 손으로 넘어갔다는 거예요. 당신은 모든 것을 당신 취향대로 꾸몄고, 그래서 나는 당신의 취향을 내 것으로 만들게 됐죠. 아니면 그런 척했던 것이었거나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이제 노라는 자신에게 내면화 된 타자의 취향과, 나아가 일체의 외부적 요소들을 제거해야 하는 자유를 손에 쥔다. 그렇다면 자연히 노라의 다음 질문은 어디서부터 다시 정체성을 회복하느냐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사람됨은 어디서 기인할까. 삶의 목적이니, 정체성이니 할 것 없이 단순하게 말해 ‘나’란 존재를 ‘나’되게 하는 요인이 무어냐는 말이다. 언뜻 쉬운 듯 보이는 이 질문에 답하기란 꽤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좌절할 필요 없다. 다행히도 우리에겐 해답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실마리가 참 많다. 유구한 역사 이래 수많은 철학자들이 이 질문에 답을 얻고자 치열한 논리를 펼쳐보인 덕이다. 다만 이 글을 통해 다루고자 하는 재료는 근대 철학 이후 인간 정체성 파악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실존주의와 구조주의로 한정하고자 한다. 먼저 전자부터 살펴보자. 실존주의 철학가로 알려진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만이 본질에 선행하는 존재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가령 의자에는 ‘사람이 앉는 것’이라는 본질이, 연필에는 ‘무언가를 기록하기 위한 도구’라는 본질이 선재하는 반면 인간은 무본질적 존재로 태어났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나갈 자유를 가진 존재라고 한다. 바로 이러한 존재 방식이 ‘실존’이다. 쉽게 말해, 실존주의자들은 ‘나’란 존재를 이루고 있는 듯 보이는 ‘본질’들(예를 들어 아들, 학생, 남자 등등)을 무한히 제거한 끝에 최종적으로 남는 ‘나’가 무엇이냐를 탐구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구조주의는 실존주의가 인간 자체만을 주목한 나머지 ‘관계’에 소홀했음을 지적하며 등장한 것으로 ‘나’란 존재를 이루는 요소들이 사회 구조에 의한 결과물일 수 있다는 의견을 제안한다. 즉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생각일 수도 있다는 논리가 가능한 것이다. 가령,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생각도 시대를 관통하는 인류 보편적 가치라기보다는 집단 사회의 안전을 위한 구조주의적 소산일 수 있다는 것이 구조주의자들의 설명이다.



노라는 헬메르의 종달새였다. 종달새의 노래 소리는 내적 세계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주인을 위한 찬가에 가깝다. 종달새라는 별칭을 명명한 건 다름아닌 헬메르다. 동등한 인격적 관계에 선 두 사람이라면 어느 누군가가 상대의 정체성을 규정할 수 없는 법이지만 헬메르는 노라의 정체성을 종달새로 규정했고, 이는 주인을 위해 노래하며, 주인의 소유물로 종속될 것을 소리 없이 명령하는 것이다. 나아가 헬메르는 노라에게 과자를 많이 먹지 말라는 둥 아이를 다루듯 통제하는 명령-복종 훈련을 서슴지 않는다. 더 무서운 것은 헬메르가 부여하는 역할에 노라 스스로 심취한 나머지 행복하다는 구조주의적 최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복잡다단한 현대 사회에도 21세기판 노라가 득시글댄다. 좋은 학벌을 자신의 본질이라 착각한 나머지 성적을 비관해서 자살을 하질 않나, 남자친구라는 역할만이 자신의 정체성이라 이입을 하고는 상대가 마음대로 안 따라주면 잔혹한 살인을 서슴지 않는다. 그 밖에도 돈, 명예, 권력 등 사회 구조가 수직적으로 제안하는 가치를 차지하고자 기꺼이 인형이 되어버리고 마는 형국이다. 이 답답한 ‘인형 사회’는 140년 전 노라의 고민이 무척 절실하다. ‘나’란 존재에게 강요하는 일체의 사회적 가치를 안에서부터 해체하며 끝끝내 남을 ‘나’에 대한 탐구 말이다. 해체 끝에 남을 ‘나’의 실존을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노라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건 바로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이다. 어떠한 외부적 요소로도 규정할 수 없는 ‘나’의 실존적 ‘책임’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인간’이 되길.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재미있으셨다면, 심심하실 때 유튜브도 가끔 놀러와주세요^^

https://www.youtube.com/channel/UCT6CEgi8KQN2MCIvCLMl-b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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