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를 활용하는 특별한 방식, 개방적이고 수용적 인식
명상이 유행하면서 마음챙김(mindfulness)이란 용어를 흔하게 듣는데 그에 대한 설명이 많지가 않다. 그런데 명상이나 종교와 상관없이 인간에게 마음챙김의 기술, 상태, 태도는 삶의 질을 높이는데 핵심임에는 틀림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주의(attention)를 기울이는 것으로 살기 때문이다. 심하게 말하면 당신이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이 곧 당신의 현재 모습이고 삶이다.
마음챙김은 주의를 활용하는 특별한 방식, 즉 현재의 순간에 비판단적으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Kabat-Zinn). 개인적으로 너무 잘 설명된 표현이다. 의도적으로 주의를 집중하여 현재에 일어나는 생각, 느낌, 감각 등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점에서 현재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방식을 말하며 이를 알아차림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현재에 일어나는 일을 판단하거나 분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 때문에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태도로 마음챙김이 해석되기도 한다. 마음챙김은 현재의 순간에 대한 비판단적 주의와 개방적 인식(알아차림)의 훈련을 수반한다(Deikman, 1982). 마음챙김을 훈련하기 위해서 우리는 명상을 한다. 명상적 컨셉의 일상 활동도 많지만...
마음챙김이 주의를 기울이고 활용하는 특별한 방식이라면 비판단적으로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 핵심이다. 이것이 개방적이고 수용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사람의 인식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시작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것은 인식할 수 없다. 의식하거나 기억하지도 못한다. 그리고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에 따라 인식이 달라진다. 내외부적인 자극이 있으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는 주의를 기울인다(의도적으로 주의를 기울일 수도 있지만 무의식적 또는 반응적으로 주의는 기울어진다). 주의를 기울이면 생각과 감정, 기억, 판단, 욕구 등과 뒤섞여 인식하게 된다. 주의를 조절하지 않으면 강한 자극이나 자신의 생각, 감정, 욕구가 강한 자극에 주의는 이끌려 가고 그에 맞게 조작적으로 인식하게 된다. 외부의 자극에 주의를 돌려 같은 것으로 보거나 듣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 감정, 욕구, 기억 등에 따라 다르게 인식하고 해석한다. 같은 상황을 경험해도 주의가 가는 곳이 달랐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주의의 활용이다. 외부의 시각, 청각 자극이든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의 자극이든 큰 자극에 주의가 이끌려 자신의 생각, 감정, 경험, 판단, 욕구 등에 의해 인식될 때 이미 그런 인식은 왜곡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마음챙김의 비판단적 주의는 자신의 생각, 판단, 욕구 등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순수한 주의(bare attention)를 지향한다. 순수한 주의로 현재에 일어나는 것을 경험할 때 현상은 자신의 의식 속에서 항상 변화하고 있으면, 일어나는 생각이나 감정은 현실이 아닌 일어났다 사라지는 하나의 현상이고 생각은 생각일 뿐이고 감정도 하나의 감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그래서 존 카파진(Kaba-Zinn)은 마음챙김의 비판단적인 주의집중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되고 불쾌한 감각, 사고, 정서로부터 덜 고통받게 된다고 했다. 이런 비판단적이고 탈중심적 관점(decentered view)을 통해 부정적 생각의 되새김질과 같은 반추 패턴을 방지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비판단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현재의 일어나는 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경험하기 때문에 수용적이고 개방적인 인식이 가능하고 왜곡된 인식을 줄일 수 있다. 알아차림, 통찰과 같은 인지적 변화는 이렇게 주의를 기울이고 인식하는 방식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질, 본아,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것도 근본적으로 주의를 활용하는 방식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비판단적인 주의의 활용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주의를 조절하는 힘이 생겨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외부적인 자극으로 이끌려 생각하고 반응하는 주의를 멈춰 세우고 판단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으려면 자신의 주의를 조절하는 힘이 필요하다. 자신의 주의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바라보려면 메타적 관점의 주의가 필요하다. 외부의 자극에 주의가 가고,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으로 주의가 가는 것을 확인하려면 ‘주의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는 바라보는 또 다른 자아가 필요하다. 마음챙김의 비판단적인 주의는 바로 메타인지를 가능하게 한다. 그 메타인지는 주의를 조절하는 힘에 의해서 가능하다. 자신이 한 일을 다른 사람이 되어 성찰하거나 자신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를 알게 하는 것이 메타인지다. 자신이 격한 감정에 이끌려 행동할 때에는 자기 자신을 인식하기 힘들다. 그 감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거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때 감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자신을 멈춰 세우고 거리를 두고 감정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비판단적 주의로 인식한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으면 자신과 생각, 감정 등을 분리해서 바라볼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힘도 더 명확해진다. 마음챙김이 잘 되는 사람은 스트레스가 높은 일이나 걱정이 있는 상황에서 휴식을 하면 걱정을 잠시 접어두고 휴식 활동에 몰입할 수 있다. 자신의 주의를 조절하여 거리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휴식 중에도 스트레스 상황이나 걱정과 상호작용하며 쉬지 못한다. 쉬고 싶어도 걱정과 스트레스에 이끌려 주의가 조절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애를 쓰지 않으면 마음챙김과 같이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경험할 기회는 많지 않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며, 어떤 욕구로 반응하고 있는지 거리를 두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개방적이고 수용적으로 인식할 만큼 여유가 없는 것이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주의는 빠르게 반응하고 대상들과 상호작용하기 바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의를 조절하는 뇌가 발달하고 늘 작동되기 힘들다. 생각과 감정, 욕구 등에 착 달라붙은 주의를 떼어 내고 거리를 유지하며 바라보는 것은 그만큼의 주의조절 근력이 발달되어 있어야 한다. 마음챙김 명상과 같은 훈련을 지속하면 주의를 조절하는 뇌 부위가 활성화되고 발달한다. 주의를 조절하는 뇌가 활성되어 있어야 주의조절이 가능하다. 운동을 통해 근력이 늘어나야 무거운 물건을 들 수 있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마음챙김은 비판단적으로 주의를 조절하며 인식하는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가능하다. 마음챙김의 뇌가 발달하게 되면 자신이 느끼는 불쾌한 감각, 사고, 정서로부터 덜 고통받고 얽매야 발휘하지 못하던 능력을 선택하고 발휘하기도 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