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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탐닉, 산책

산책이 주는 충만함의 과학

by 김권수

긴 글이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 투박하게 글 읽어주는 사운드 파일입니다. ^^


나로서 완벽한 경험

주로 금요일이기는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학교와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수업을 간 적이 많았다. 걷기 위해서다. 의무적으로 시작했지만 할수록 만족감이 커졌다. 내가 사는 진주는 남강이 흐르고 있는데 남강을 따라 자전거나 걷기를 할 수 있도록 길이 나 있다. 강변의 조깅 코스야 어디에나 있지만 남강은 길이 없는 절벽 아래에 나무 바닥으로 길을 만들어 자연에 안겨서 걷는 느낌을 준다.


산책.png 사진 : 경상남도 인터넷 뉴스 갱남피셜 김종신 명예기자

걷고 있으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피어오르다 나중에는 내가 걷고 있는지도 모를 때가 있다. 모든 것이 차분해지고 극도의 균형감을 느낀다. 이때 느끼는 것은 나도 모르게 많은 줄들에 내가 묶여서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꼭 근심, 걱정이 아니라도 생각들이 만들어 낸 줄들이 무의식적으로 나를 당기고 있었다는 느낌이다. 그런 줄들이 끊어지고 자유로움을 느끼니 좋을 수밖에 없다. 자유롭기도 하지만 존재감도 강하게 느낀다. 오직 내 걸음의 동력으로만 완벽하게 마무리되는 경험이다.


가는 것도 멈추는 것도, 속도도 판단이 아니라 감각과 감정에 의해 움직인다. 걷고 있는 다리와 근육, 바람을 맞는 피부 감각, 물소리와 바람 소리, 장소에 따라 다르게 오가는 냄새, 햇살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풍경의 시각, 입속에 흐르는 맑은 침, 온전히 나의 모든 감각과 기관이 자연스럽게 제 역할을 평등하게 하는 순간이다. 그렇게 얻는 만족과 쾌감이었다. 이렇게 걷다 보니 차로 10분이면 가는 거리를 거의 2시간의 여유를 가져야 한다. 아이들이 이동할 때 그 짧은 거리를 그렇게 오래 걸리는 것이 이해가 간다. 그들은 생각과 발로 걷는 것이 아니라 오감으로 상호작용하며 온전히 걷기 때문이었다. 완전해진 나 자신만으로 특별하게 탐닉하는 시간이다.


소외를 극복하고 디테일을 살리는 속도

산책이나 걷기가 좋은 줄은 알았지만 생각에 묶여 있을 때는 참 지루하기도 하다. 빠르게 움직이며 무의식적으로 익숙해진 속도를 놓지 못할 때도 금방 지루해진다. 걷고 있는 공간과 시간에 빨려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천히 걷는 것에서 쾌감을 느낄 때 속도가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는지 새롭게 느낄 수 있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을 때 우리의 감각은 가장 강한 자극에만 반응하느라 다른 감각은 제 역할을 할 기회가 없다. 그래서 제대로 느끼고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간다. 바람의 온도와 세기에 따라,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 감각이 춤을 추듯이 깊고 세밀하게 반응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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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는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하고 쓸모없이 느끼게 만든다. 매일 걷는 길, 잘 알아서 흥미롭지 못한 길이 낯설고 흥미롭게 느껴지는 것은 천천히 걷고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다. 빠른 속도는 우리를 쉽게 무료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한다. 디테일이 빠진 익숙함 속에서 익숙하다고, 다 안다고 생각하며 무료하게 지나치는 일상 속에서 정말 서운하게 소외된 자신을 느끼게 한다. 병을 낫게 하는 약제를 급하게 씹으며 아무 효과가 없다고 말하지만 진작 약효는 천천히 오래 씹었을 때 제일 마지막에 흘러나오는 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얽매이지 않고 평소보다 느린 속도로 걸으면 익숙함이 깨지고 새로움이 다가온다. 소외된 감각이 살아나면서 그 감각 속에 갇혔던 분노가, 슬픔이, 망설임이 빗장을 풀고 나오면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걷지 않고 단지 이동만 한 것이다.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소외시키고 살아온 것이다. 혼자서 느리게 걷는 걸음의 자연스러움이 감각과 생각을 깊이 몰입하게 만든다.


유연하게 살아나는 생각과 해석력

걷거나 산책을 하면 학습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의 해마가 살아나서 그런지 생각들이 살아난다. 산책이나 걷기를 실험한 여러 연구에서 걸을 때 해마가 커지고 작업기억이 향상되었다. 나이가 들면 뇌는 노화되고 주의력도 떨어지는데 산책은 이런 면에서 뇌 건강과 장수에 효과적이다. 뿐만 아니라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가 살아나고 이해하지 못했던 감정이 자연스럽게 해석된다.

산책3.png 기억과 학습을 담당하는 해마 뉴런을 생성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이라고 하죠! 거기에 깊이 음미하는 명상 같은 산책은 뇌의 건강과 균형을 위해서 가장 좋은 투자가 될 수 있습니다


바쁘게 쫓겨서 일을 할 때는 일시적으로 정보를 저장하고 여러 측면으로 고려하는데 활용되는 작업기억의 용량이 꽉 차는 경우가 많다. 거기다 회사 일, 집안일, 가족 걱정, 앞 날 걱정 등으로 뇌의 용량은 쉽게 가득 차 버린다. 작업기억의 용량이 가득 차 있으면 주의를 조절하는 능력도 떨어지고 생각도 자유롭지 못해서 일상의 해석력도 떨어진다. 그러니 마음은 더 복잡하다. 산책이나 걷기를 하면 가득 찬 작업기억 용량을 비워서 여유가 생기니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가 되고 새로운 생각들이 자유롭게 일어나는 것을 느낀다.


천천히 걸으면 몸도 활력이 생기지만 뇌의 혈류 공급도 원활해지면서 뇌도 활성화된다. 이런 것을 보면 위대한 사상가, 예술가, CEO, 과학자들이 산책을 즐겼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된다. 비울 수 있어 묶였던 생각이 끊어지고 새로운 생각의 경로가 활성화된 것이다.


맨발로 연결되어 충만한 즐거움

풀리지 않는 생각이 몸집을 불리고 있거나 쉽게 잠잠해지지 않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는 맨발로 걷는다. 빨리 걷지 않으면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자극이 생각과 감정을 끌어내린다. 피뢰침에 몰린 낙뢰가 땅으로 흡수되듯이 생각과 감정은 산산이 분해되어 잠잠해진다. 굳이 표현하자면 자연의 일부로 편입되는 듯 묵직하고 든든함이 안정감을 찾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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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맨발로 걸을 때 느낀 것은 참 눈치를 많이 본다는 것이다. 혼자서 걷는데도 생각은 쉽게 사람의 눈치, 사회의 눈치, 제도의 눈치 밥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런데 맨발로 걸을 때의 든든함은 그런 눈치 볼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눈치 보느라 느끼지 못했고 강제로 느껴야 했던 것을 땅바닥과 발바닥이 만나며 다 섞어 버린다. 발은 내장과 연결된 혈자리가 시작되는 곳이고 발바닥의 압력 신호가 뇌에서 다른 감각기관의 정보와 결합해서 보행과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한다. 몸과 뇌의 균형이 조절되니 든든함이야 단연하다 싶다.


맨발로 걸을 때는 몸이 원하는 대로 걸으면 되는데 한 가지 팁이 있다. 주의를 발끝에서 놓치지 않는다. 발이 땅에 닿는 느낌을 놓치지 않고 이어나가다 보면 걸으면서도 놓지 못하는 잡념이나 감정이 쉽게 사라진다. 속도를 조절하기도 편하다. 익숙해지면 금방 자유롭게 주의를 놓아 버려도 된다. 양쪽 발바닥에 부담스러우면 한쪽 발바닥이 땅에 닿는 것만 인식해도 좋다. 나를 중심으로 걷는 행위가 통제되면서 리듬감도 살아난다.


맨발로 걸을 때는 시간이나 목표를 절대 두지 않는다. 얼마나 할지 어디로 갈지는 발바닥의 감각에게 맡긴다. 목적이나 목표, 제약사항이 많아지면 생각과 감각이 균형을 유지하지 못해서 생각이 앞서 나가게 된다. 생각이 주도하면 일상의 이동과 별 다를 것이 없고 생각에 묶여서 머리가 쉬지 못하고 감각이 스며들지 못한다. 새로운 생각과 감각이 피어날 틈도 생기지 않는다. 산책이나 걷기는 긴장되고 좁아진 마음만 극복한다면 도구나 준비, 조건이 필요 없는 가장 충만한 즐거움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가장 실존적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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