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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트라슈 Aug 12. 2020

책을 팔았다

풍성하게 존재하기 위해


언제부터인가 집에 책이 많아졌다. 책이 늘어난 만큼 책장도 늘어났고 집은 점점 좁아졌다. 독립 후 네 번의 이사를 다닐 때마다 이삿짐 업체에서는 책을 싸고 옮기느라 애를 먹었다. 책은 낱권일 때는 보잘것없다가 한데 묶이면 그 무게가 진가를 발휘한다. 이삿짐센터에서 기피하는 곳 중 하나가 책 많은 집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나는 많은 여자들이 환장하는(?) 명품백, 신발, 화장품, 옷에 전혀 관심이 없다. 에코백이 유행하기 전부터 천가방만 들고 다니는 나를 보고 부서 선배는 "홍 과장, 그래도 명색이 대기업 과장인데 맨날 그런 시장바구니 같은 거 들고 다니지 말고 명품 백 하나 걸치고 다녀~" 라며 나름 관심으로 포장한 불필요한 조언을 한다. 그때마다 "제가 명품인데 그런 걸 왜 걸쳐요?" 라며 우스갯소리로 받아친다. 그러면 또 답답하다는 듯이 "얘가 또,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 하네. 우리 와이프가 그러는데 요즘은 그런 차림으로 유치원 학부모 모임 나가면 왕따당한대. 최대한 명품으로 힘을 줘야 그나마 대화에라도 끼워준대~" 이 말을 듣고 오히려 더욱 사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유독 지출을 아끼지 않는 건 책이다. 학창 시절 학원비도 빠듯했던 집안 형편에 참고서가 아닌 책을 사는 건 사치였다. 필요한 책은 인근 공공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고, 직장인이 되고서야 도서관에 갈 시간이 없어 늘 인터넷으로 책을 한 번에 주문해서 읽었다. 그러다 보니 차츰 집에 책이 쌓여갔고, 책장에 빼곡히 꽂힌 책을 보면 내심 뿌듯하기도 했다.


난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들은 최대한 나중에 구매한다. 그동안 베스트셀러 책들을 구매했다 실패한 경험이 많아 인기가 시들 시들 해질 때쯤,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때 구매하는 것이다. 피그말리온 효과일지 모르겠으나 그러면 확실히 실패할 확률이 낮았다.


그런 내가 얼마 전 책을 팔았다. 카트에 세 차례에 걸쳐 나눠 담아 70여 권의 책을 중고서점에 팔았다. 20만 원 정도의 돈이 수중에 들어왔다. 아직 집에 그 5배 정도 되는 책들이 더 남아있지만 이도 곧 정리할 예정이다. 예전 같으면 아파트 분리수거하는 날 버렸을 텐데 무게가 상당해 분리수거하시는 분들도 기피하실 것 같았다. 기부를 할까도 고민하던 중 기부하는 곳이 생각보다 멀어 고민 끝에 집에서 가까운 중고서점에 간 것이다.


중고서점은 처음 가보았는데 꽤 넓고 쾌적했다. 거기에 전문적이고 신속한 일처리가 신뢰성을 더하여 좋은 인상으로 남았다. 띠지까지 그대로 있을 정도로 깨끗한 수준의 책이 대부분이었으나, 매입 가격은 그런 책의 상태와는 크게 상관없이 해당 도서의 재고량에 따라 책정되었다. 가격을 떠나서 버려질 뻔하다 누군가에게 가서 새로운 서생(書生)을 맞이할 책들을 생각하니 괜히 찡했다.




책을 팔기로 한 결심은 의외의 계기에서 비롯되었다.


회사에서 업무로 알게 된 40대 후반의 부장은 임원 미팅에서도 핸드폰을 놓지 않을 정도로 e-book을 즐겨 보았는데, 불량한 태도로 미팅 도중 임원들에게 몇 차례 지적을 받을 정도였다. 업무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것으로 유명한 그를 단체 회식 자리에서 만나 책을 좋아하시는 것 같다고 에둘러 말하니, 칭찬으로 받아들였는지 신이 나서 되묻는다. "우리 집에 책이 몇 권인지 아니?" 밑도 끝도 없는 질문에 당황하며 "오.. 백권 정도요??" 대답했더니 코웃음을 치며 "3000권이야" 라며 우쭐댄다.


추가 질문을 기다리는 듯하여 자본주의 리액션을 덧붙여 "와~ 엄청나네요. 그럼 혹시 '가장'이라고 하면 힘들겠지만 그나마 인상 깊었다 하는 책들이 있으세요??"라고 물으니 정말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없어" 토끼눈을 하며 "네?? 없다고요??"라고 되묻는 날 보며 "응, 정말 없어. 아직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지 못했어"라고 말한다.


돌아오는 길에 가만 생각해보니 3000권의 책을 읽었다고 하기엔 그의 평소 업무 메일, 사적 메일(한 번씩 부서원들에게 보내는 비업무성 메일)에서 드러난 작문실력이 너무 형편없었다. 정말 3000권을 읽은 게 맞을까, 권 수만 세어본 게 아닐까 할 정도로. 그 부장과의 대화 이후로 책은 정량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정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집으로 돌아와 빽빽이 꽂힌 책장을 한번 훑어보고 심호흡을 했다. 그때였다. 이 책들의 수만큼 나의 지혜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 건.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애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는다. 행복의 비결은 필요한 것을 얼마나 갖고 있는가가 아니라 불필요한 것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는가에 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늙음이 아니라 녹스는 삶이다. 인간의 목표는 풍부하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 법정스님, '살아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 中


오늘도  녹슬지 않고 풍성하게 존재하는 삶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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