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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흥준 May 20. 2021

마음 속 이야기 1_ 할머니에 대하여

나의 아빠의 엄마, 그니까 할머니

난 그녀를 ‘아빠엄마’라고 불렀다.

할머니란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 알고 있는 유일한 단어였던 엄마와 아빠를 조합해 아빠엄마라고 할머니를 불렀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아빠엄마가 아니라 할머니라고 불러야지”라고 나를 타이르곤 하셨지만, 나는 “아빠의 엄마니깐 아빠 엄마야” 라고 억지를 부렸다. 할머니란 단어를 이해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부터 내 옆에는 늘 할머니가 있었다.

  난 어릴 적 어머니의 ‘껌딱지’였다. 엄마가 어딜 가든 꼭 옆에 붙어있어야 했고, 그렇지 않으면 그곳이 어디든 누워버린 후 하늘이 떠나가도록 울었다. 그 결과, 초등학교 1, 2학년을 어머니가 근무하던 초등학교에서 어머니 손을 잡고 다닌 것은 물론, 어머니를 따라 5,6학년 형 누나들의 수학여행도 따라갔다. 지독하게도 어머니를 귀찮게 하는 아들이었다.

  그런 내가 따라가지 못하는 곳이 있었는데, 어머니의 대학원 강의였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일 때, 대학원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어머니는 매주 화. 목요일마다 야간 강의를 들으러 대학교에 갔고, 나는 그곳에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가 강의를 들으러 가야 했던 날이면 늘 학교가 끝날 때쯤 ‘아빠엄마’가 교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그 날마다 엄마랑 헤어지기 싫다고 눈물 콧물을 흘리면서,‘아빠엄마’의 손을 잡고 퉁퉁 부은 눈으로 집으로 향했다.

  난 그때쯤 할머니란 단어를 배웠는데, 그냥 할머니라 부르면 될 것이지 꼭 할머니를 뚱땡이 할머니라고 부르곤 했다. 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나를 혼내긴커녕 “일로와” 하시면서 나를 안아주었다. 아마 당신은, 어떤 이름으로 호명되는가의 문제보단, 나라는 존재가 늘 당신을 호명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을 것이다.

  할머니와 보냈던 그 날엔, 나는 할머니가 엄마라도 된 듯 할머니 손을 붙잡고 어디든 따라다녔다. 근처 슈퍼, 시장, 약국과 병원. 어디를 가든 할머니는 “우리 손주 오늘 받아쓰기 100점 맞았대요” 라거나 “우리 손주인데 시험만 치면 늘 100점이야” 라거나 “우리 손주인데 벌써부터 인물이 확 살지 않아?”라고 하시며 틈만 나면 나를 자랑을 하셨고 점포 주인과 약사와 의사는 나를 바라보며 “어휴, 손자분이 잘생기기도 하고 공부도 잘하네”라고 말해주며 할머니의 말에 호응해주었다.

난 할머니의 손에서, 모진 말 하나 듣지 않고 따뜻한 말만 듣고 살았다. 사랑만 가득 받고 자랐던 어린아이였다.

  그 어린아이는 음식으로도 사랑을 받았다. 나는 할머니의 음식을 사랑했다. 특히 굵은 고춧가루와 큼지막하게 자른 무가 들어간 고등어조림을 좋아했다. 할머니가 그것을 만들 때면, 난 밥 세 그릇을 거뜬히 비웠고 할머니는 그런 나를 보며 옅은 미소를 보이셨다.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매일 생선가게에 데려가셨고, 늘 구이용 고등어 2마리와 조림용 고등어 2마리를 달라 하셨다. 생선가게 사장님이 고등어를 손질하는 시간 동안, 그녀는 생선가게 사장님한테 “우리 손주는 고등어를 너무 좋아해서 나중에 생선가게 딸한테 장가보내려고”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나는 고기보다 생선을 더 좋아하는 어른으로 자랐다. 나는 어린 날의 많은 낮을 할머니의 손을 잡고 보냈고, 많은 밤을 할머니 무릎에 얼굴을 대고, 아따맘마와 짱구는 못 말려 따위를 틀어놓고 잠든 상태로 엄마를 기다렸을 것이다. 수 없이 많았던 그 낮과 밤에 할머니는 늘 내 옆에 있었고, 구김살 하나 없이 손주를 키우고 싶으셨을 것이다.

물론 당신의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내가 받은 사랑은 분명 그것이었다.

*

  할머니가 사는 곳은, 의정부시 장암동의 작은 아파트였다. 우리 집과는 차로 약 30분 거리였고, 덕분에 명절 귀성, 귀경길 정체를 몸으로 느껴본 적이 없었다. 명절이 아닌 날에도 자주 할머니 집을 찾곤 했으나 내 기억 속 강렬히 남아있는 할머니 집 풍경은 명절 풍경이었다. 명절 때가 되면 20평 남짓 되는 할머니 집에 우리 가족이 찾아갔고, 아빠는 외동이었기에, 우리 가족과 할머니만 명절을 함께 보내는 식이었다. 명절 연휴 첫날이 되면 어머니와 나만 할머니 집을 찾았다. 명절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어머니와 난 연휴 첫날에 먼저 가서 전이나 나물, 송편과 만두 같은 차례 음식을 만들었다. 늘 차례 음식 준비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차지였고, 난 그게 이상했다. 전 반죽에 계란과 밀가루를 묻히고 전을 굽는 흉내를 내면서 물었다. “왜 엄마랑 할머니만 음식 만들어? 나도 하고 아빠도 하면 되잖아?” 할머니는 그럴 때마다 “하지 마라, 사내 애가 고추 떨어지게 뭐 하는 거냐”라고 말하셨다. 어머니는 그 옆에서 늘 밤 껍데기를 깎고 있거나, 명태 가시를 손질하고 있었고, 손은 늘 물에 퉁퉁 불어 있었다. “너는 잘 못하잖아, 음식 망쳐”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말렸다. 나는 끝까지 음식을 하겠다고 고집부렸고, 그 결과 추석의 송편과 설날의 만두는 내 차지가 되었다. 기어코 음식 준비를 돕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아들을 바라봐야 했던 어머니는, 누군가의 손자였던 나이기에, 늘 눈치를 봐야 했을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하루 음식을 준비하고 엄마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할머니와 단둘이 밤을 보냈다. 할머니는 나에게 화투를 알려주시곤 하였는데, 난 그게 같은 그림 맞추기 카드 게임인 줄 알았다. 할머니는 늘 나한테 아빠에겐 화투 알려준 것을 꼭 비밀로 하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는 화투를 매우 싫어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화투와 마작, 놀음으로 집과 땅을 잃었고,  졸지에 가장이 된 아버지는, 할머니와 새벽부터 김밥 따위를 말아 지하철 역 앞에서 김밥 장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했다.

  다음 날이 오전이 되면, 온 가족이 할머니 집을 찾았다. 차례상 준비를 한 후, 차례를 지냈다. 차례를 지낼 때가 되면 늘 차례상이 차려져 있는 거실에는 아버지, 형, 나만 남고, 어머니와 할머니는 주방에서 차례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곤 했다. 난 그 시간 동안 엄마랑 떨어지는 게 싫다고, 주방에 있는 어머니에게 달려가, 어머니 옆에 달라붙어 있었다. 난 엄마 품에서, “엄마랑 할머니는 절 안 하는데 난 왜 해야 해. 나 하기 싫다고”라고 싫증을 부렸고, 그럴 때마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서로의 눈치를 보며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었던 사람의 식사를 위해, 매년 두 번씩 무릎과 허리가 나가는 것도 모르고 일을 해야 했다.

  난 몰랐던, 아니 몰라야 했던, 할머니와 어머니만 공유했던 그 미묘한 눈치와 분위기가 아버지, 그니깐 부계의 집안을 안정감 있게 유지시켰던 것이다. 난 그 눈치와 분위기, 속사정을 세세히 알 필요가 없었던 것이고, 그 알 필요 없음은, 분명히 내가 가진 권력이었다.

   *

  나는 할머니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 가족 아무도 알지 못했다. 2013년, 설을 보내고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이었다. 할머니는 고질병이었던 무릎을 수술하기 위해 여러 검사를 받으셨는데, 도중 더 큰 문제가 발견되었다. 예상치 못했고, 찾아올 줄 몰랐던 간암 진단이었다. 이미 진행이 많이 되었고, 손댈 수 없다고 했다. 할머니는 곧바로 입원하셨다. 고대 안암병원에 입원하셨지만, 따로 치료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말에, 집 근처 요양병원으로 병원을 옮기셨다. 입원하신 후, 당신의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늘 튼튼했던 뚱땡이 할머니였는데, 살은 계속 빠지셨고, 혈색은 안 좋아지셨고, 기운도 없어지셨다. 더 이상 할머니를 그렇게 부를 수 없었다.

  그런 할머니가 너무 어색했다. 초점 없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계시는 할머니를 바라보기 힘들었다.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실까, 나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걸까, 당신이 그렇게 이뻐하던 손주가 앞에 있는데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는 건가, 당신은, 당신이 암에 걸렸고, 치료할 수 없고,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내 앞엔 초점 없는 당신의 눈동자만 있었다. 미세하게 올라간 할머니의 입꼬리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나왔다. 매주 할머니를 뵈러 갈 때마다, 병원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울었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울 수밖에 없었다. 그 해 8월, 의사는 이번 주가 고비라고 했다. 월요일은 어찌 넘어갔는데 화요일 새벽 세시 반에 나도 모르게 눈이 떠졌다. 주위를 보니 어머니, 아버지가 없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거 같아 병원에 가고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날 새벽 돌아가셨다. 그때 틀어놓고 잤던 노래는 딕펑스의 <VIVA 청춘>이었고, 난 아직도 그 노래를 듣지 못한다. 6개월 간 할머니는 서서히 세상을 떠나고 계셨고, 우리 가족은 서서히 할머니의 죽음을 준비했다. 할머니의 장례식은 큰 차질 없이, 준비했던 행사처럼 진행되었다. 울지 않았다. 슬픈 것인지 몰랐다. 할머니와 보냈던 억겁의 시간은 떠오르지 않았고, 내 앞엔 쉴 새 없이 몰려왔다가, 빠져나가는 조문객들만 보였다. 장례 둘째 날, 입관식에 참석해야 했다. 난 그게 뭔지 잘 모르고 아버지 손을 잡고 따라갔다. 그곳엔 할머니가 있었다. 장례지도사는 나에게 마지막으로 할머니 손과 발을 주물러 달라고 했다. 먼길 가셔야 하니깐. 아버지는 울었다. 처음 봤다. 나는 조심스레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차가웠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손이 아니었다. 그 어린 날에, 이 손을 잡기 싫다고 그렇게 울던 내가 떠올라, 울어버렸다. 할머니는 용인의 한 납골당에 안치되셨다. 할머니가 떠난 후의 내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다를 것 없이 학교를 다녔고,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이곳저곳 다녔다. 난 그렇게 할머니의 체온을 조금씩 잊어간 것이다. 잊었던 할머니를 다시 찾았던 것은 군 입대 이틀 전이었다. 유리창으로 막힌 할머니의 유골함 앞에서, 이제 와서 죄송하다고, 많이 보고 싶었다고, 할머니가 아끼던 손주 이제 군대 간다고, 걱정 안 시켜드리게, 열심히, 안 다치고, 건강하게 다녀오겠다고, 많이 사랑한다고 말했다. 당신이 내 곁을 온전히 떠난 후에야, 난 그제야 당신을 ‘아빠 엄마’도 아닌, ‘뚱땡이 할머니’도 아닌 할머니라 부르게 되었다.

*

  당신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어렴풋이 기억나는 어릴 적 시절부터, 지금까지 시간여행을 했다. 나는 당신과 상상할 수 없는 긴 시간을 함께 보냈고, 당신에게 상상할 수 없는 큰 사랑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당신의 삶과 마음에 다가간 적 없었고,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늘, 이러셨겠지, 이런 마음이었겠지, 유추하며 당신을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 죄스럽다.

  앞으로도 나는 당신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없겠지만, 당신 곁에서, 곁에 앉아, 가만히, 당신을 기억하고 생각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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