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히도 습해 영원한 고통처럼 느껴졌던 여름이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눈 깜빡한 새에 금방 달아나는 가을을 올해는 드디어 찾나-하고 좋아했던 것도 잠시였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지더니, 어느새 입술과 손을 비롯한 비루한 육신의 이곳 저곳에서 겨울이 오고 있다고 앞다투어 말한다. 난 차가운 공기로 내 콧속을 소독해주는 겨울을 참 좋아하지만, 그래도 올해 겨울은 참 춥겠다싶어 벌써부터 조금은 겁이 난다.
명절이 낀 10월은 유독 바쁘게 시간이 흘렀다. 이번 추석엔 나와 나이가 같은 사촌동생이 결혼한다고 했다. 철없는 맘에 내심 한심하게 봤었던, 공부도 안하고 매일 노는 것과 교회에만 관심있던 사촌동생에 대한 기억이 무색하게 갑자기 내 앞에는 가정을 이루고 그 이후의 삶을 그리는 어른이 서있다. 자형'만'을 닮아 걱정이던 조카는 시간이 지날수록 누나와 더 닮아간다. 뿐만 아니라, 보지 못했던 몇 달 새 말이 더 늘어있다. 온갖 것들이 그렇게도 신기한지 나와 손잡고 걷는 한걸음마다 멈춰서 "삼촌, 이게 뭐야?"하며 혀짧은 소리로 연신 질문을 내뱉는다. 늘 새로운 것 투성이일테니 하루하루가 지겨울 틈이 없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변화를 마주하며 시간과 발맞추고 있다.
나는 1년 전, 그때의 가을과 별다른 일이 없다. 아무 특별한 일도 없이 10년의 마지막 겨울과 새로운 10년의 시작을 마주하기만을 기다리며, 아니 정확히는 오지 않기를 기대하며 눈만 꿈뻑거리며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다. 어제는 책을 읽었다.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 사람'과 손원평 작가의 '아몬드'다. 두 책 모두 등장인물이 바라던 그 순간이 오면 데우스 엑스 마키나처럼 모든 어려움이 사라질 것이라 생각하는 장면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꿈이 이뤄지는 순간, 적응하지 못하고 오히려 더 큰 혼란과 변화에 직면한다. 나도 그렇다. 내 삶의 가장 큰 과업이라고 생각했던 사소했던 문제들을 지나자마자 내 삶은 항상 더 큰 숙제에 내몰린다. 아무도 내 현재의 가장 큰 과제 다음의 삶이 어떨지, 그 다음 과제는 무엇일지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허지웅 작가가 한겨레에 연재했던 글을 다시 찾아본다. 삶의 목표나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들의 인생을 대표적으로 함축한, 행복했던 7가지 순간들을 혼자 꼽아보라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까지의 내 짧은 생에서의 행복한 순간들은 누구나 다 겪는 입시의 끝, 홀로서기의 순간, 스쳐지나갔던 연인들과의 기억들 따위가 전부다. 제한된 7개의 장면들을 위해, 아직은 그다지 선택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순간들 뿐이다.
어제는 잠을 설쳤다. 너무 생생한 꿈 탓에 마치 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을 마주한 것 같았다. 목에 텁텁하게 낀 가래를 뱉어내고 우물우물 양치로 개운하지 못한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내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디게 흐르게 해 줄 한 장면이 있었으면 하고 바래본다, 오랜 10년을 조금이라도 더 함께 보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