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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빈 Jun 15. 2023

응급실에서 한 생각

삶의 전진 후에 찾아온 폭풍

가을 들어 내 몸은 응급실에 갈 정도로 좋지 않았다. 그간의 작품활동과 전시활동이 부담이 됐는지 원래도 좋지 않았던 몸이 더 나빠진 것이다. 심한 구토와 각종 통증, 저혈압 쇼크로 아빠 등에 업혀 급하게 응급실에 가는 동안 핏기 하나 없는 손과 발이 너무 하얘서 징그러울 정도였다.








아시아프 이후 생각보다 많은 제안을 받게 되었다. 전시 참여라던가, 예술 관련 사업 참여라던가. 모두 한 번의 기회로 이어진 다른 기회들이었다. 이렇게 제안받을 수 있는 것이, 또 제안해 주신 것들 모두 감사했다. 건강했다면 아마 다 참여하려고 했을 거다. 하지만 내 몸의 한계는 극명했고 모든 것에 참여할 여건도 되지 못했다.


꾸준히 작업하는 건 쉽지 않았고, 작은 작품을 제작하는 것만 해도 시간이 오래 걸렸고, 그만큼 큰 작품은 더더욱 하기가 어렵고… 어느새 점점 할 수 없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른 신진작가들이 왕성하게 활동을 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매일 출근하듯 꾸준한 루틴으로 작업을 하고, 작품도 다양하게 많이 쌓아두고, 여러 다른 전시도 하고, 아트페어에도 나가고. 다들 물 들어올 때 노 젓느라고 바쁜 걸 테지. 나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속상했고 질투가 났다.


지난 여름날 신진작가로 데뷔를 치르고 전시 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내게 선물과도 같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작가들과 나를 비교하기 시작했고 감정은 복잡해졌다. 감사함보다도 착잡함이 커져갔다. 예술을 하겠다고 다짐할 그때의 기쁨과 설렘을 잃어버린 채 내 발목을 잡는 현실에 자꾸 눈이 돌아가고 있었다.


날카로운 현실에 비춰보면 내 삶이 도무지 힘이 없는 것 같았다. 남들보다 몇 백배는 느린 내게 실감되는 이 현실이 소름 돋게 차갑고 서늘했다. 나아가는 듯해도 나아가질 못하는 모습. 현실의 벽이 너무도 크게 느껴졌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나. 건강도 없고 돈도 제대로 벌지 못하는데 앞으로 계속 작업은 할 수 있나? 작가가 됐다고는 해도 현실은 막상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처럼 보였다. 부정적인 생각에 이어서는 또 억울한 감정이 따라왔다.


그런 중에 가장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떻게든 작업을 하려고 하면 내 안에 제동이 걸린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아니, 겨우 열 작품쯤이나 했을까. 얼마나 했다고 벌써 작업이 안 되는 건지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산만하고 조급해지는 모습은 내 속의 평안이 깨졌다는 걸 고스란히 드러냈다.


점점 길을 잃어가는 기분이었다. 내 마음도 자꾸만 두 갈래로 흔들렸다. 이게 내 삶이라고 인정하며 현실을 살아내려는 마음과, 이건 내 삶이 아니라고 거부하며 억울해하고 슬퍼하는 마음. 전자의 마음으로 내가 예술의 길로 나아가게 됐고 작가로 발돋움하게 됐다면 후자의 마음으로 나는 계속 뒤돌아 눈물을 흘렸다.


이 모든 것에 감사하다고, 결심한 대로 꿋꿋이 나아가겠다면서도 염려의 바람이 불어오면 어김없이 하나였던 마음이 찢어져버렸다. 완전하게 내 욕심을 내려놓지도, 삶을 받아들이지도 못한 것이다. 언제쯤이면 이 두 갈래 마음이 하나로 합쳐질까. 언제쯤이면 미련 없이 내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억울하게 빼앗긴 삶이 아닌, 이것이 진짜 내 삶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언제쯤이면. 도대체 언제쯤이면.








응급실 침대에 누워 고통에 신음하는 동안 생각했다. 불과 얼마 전에 내 삶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느니, 욕심을 내려놓기 힘들다느니 하는 등의 불만스러운 얘기를 해댔지만 그런 얘기들은 다 부차적인 거라고. 이렇게 또 한 번 큰 소동을 일으키며 아프니까 삶을 받아들이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게 당장에 구체적인 내 삶인 것을. 나는 내 삶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멀리 바라보며 걱정할 필요도 없고 그저 현재의 한순간 순간을 꼭꼭 씹어서 잘 소화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이렇게 한 치 앞만 겨우 보며 사는 내게는 소망이 없는 걸까? 스스로 질문했다. 그리고 절대 그렇지 않다는 답에 이르렀다. 현재에 충실함이, 매일 한 발짝씩 나아감이 소망적이다. 미래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현재를 거치지 않은 미래가 없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까지 나는 소망을 꼭 먼 미래에 대해 두루뭉술하게라도 그려낼 수 있어야만 가능한 거라고 여겨왔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라면 이 세상에 소망은 없는 셈일 텐데 말이다. 소망은 미래지향적이다. 그러나 미래를 그릴 수 있어야만 가질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님을 이렇게 아프면서야 마음에 새겼다. 미래를 그릴 수 없어도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것이 소망이고, 그런 소망이 헛되어 보일지 모르나 세상에 더 빛을 발하리라 믿었다.


무엇보다도 계속 흔들리는 내 마음을 나약하다고 자조하거나 부끄러워 않기로 했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마음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만나지 못한 삶(내가 건강했다면 살게 됐을 삶)과의 이별을 애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답을 내렸다. 만나지도 못한 삶과 이별이라니, 모순적이지만 적어도 내게는 맞는 말인 것 같았다. 여전히 나는 만나지 못한 삶에 미련이 있고 그 삶을 만나고 싶어 했으니까.


그 삶은 만날 수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얼른 털어내라고 스스로를 닦달하거나 보채지는 말기로 하자. 당연하리라 여긴 삶으로부터 거절당한 슬픔, 억울함 등 느껴지는 감정을 충분히 인정하고 눈물을 흘리자. 대신 만나지 못한 삶에 웃으며 안녕을 고할 수 있을 때까지 이 현실을 믿음과 감사로 살아내자. 그것이야말로 진정 내 할 일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 모든 갈등과 소동 끝에 더욱 확신하게 된 나의 주제는 소망이었다. 삶에 소망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우린 다 무언가를 바라고 사는데, 그 바라는 것이 끊어지는 게 절망 아닌가. 절망이 죽음이라면 소망은 삶이다. 나는 삶을 노래하고 싶다. 끊어지지 않는 소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그렇게 앞으로 온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작품을 한다면. 그때에는 내 삶도 기쁘게 바라볼 수 있겠지.








물결이 있는 해 질 녘 | Waves at Dusk,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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