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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혜빈 Jun 16. 2023

내가 가진 의미

예술보다 인생

앞으로 작업에서 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다. 작업할 때마다 내 안에서 걸리는 제동은 이제 이렇게만 갈 수는 없다고 알리는 신호 같았다. 더 중요한 본질적 문제, 즉 작가로서 내가 추구하는 예술과 표현하고자 하는 것들을 제대로 찾아야 했던 것이다.


처음 몇 번의 전시는 어떻게든 해보겠는데 그 이후를 생각하면 점점 막막하게 느껴졌다. 물론 나의 주제는 ‘소망’이다. 그런데 이제 갓 태어난 내 작품 세계는 기반이 약했다. 허술하고 아직 단단하지 못해서 이대로 계속 끌고 갈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만약 건강을 되찾고 비용 걱정 없이 작업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다 해도 이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소용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을동안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그 고민의 무게가 어찌나 무거웠는지 스스로 만든 부담감에 질식하는 것 같았다. 고민할수록 고민한다고 금방 답이 나올 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될 뿐이었다. 앞으로 작품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아주 중차대한 문제. 좀 더 구체적으로 내 작품 세계를 알아가고 정의할 시간이 필요했다. 꼬꼬마 신진작가로 데뷔하던 즐거움은 아주 잠시였고 나는 또 얼마나 걸릴지 모를 기다림 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결국 모든 작업에서 손을 떼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나의 건강을 위해서라도 잠시 모든 고민을 없는 취급 하며 지내기로 했다. 쉬다 보면 언젠가 자연스럽게 답을 찾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게 6개월이나 걸릴 거라고는 예상 못했지만 말이다.








작업을 그만둔 지 두 달여 지난 시점. 고민을 벗어나 시간을 흘려보내니 차차 알게 된 것이 있었다. 바로 내가 작품 하는 것의 의미적 차원의 답이었다. 그건 눈에 보이지 않고 말로 적확히 표현할 수 없을지라도 분명히 느껴지는 게 있다면, 그것이 그 자체로 나타난 의미이고 정의라는 것이었다. 마치 ‘사랑은 무엇 무엇이야’하고 말해주기보다 사랑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상황과 관계를 한 번 보여주는 게 더 가슴에 와닿는 것과 비슷한 이치랄까. 말로 설명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지만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것들 역시 세상에는 존재한다. 이 사실을 비로소 예술과 내 작품 세계 안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이 말은 내가 작품에 특별한 무언가를 담으려 애쓰지 않아도 거기 자연스레 담기기 마련이라는 뜻과 같았다. 이로써 한 번 더 확인하게 되는 것은 삶이 작품이요,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 역시 작품이라는 말이었다. 하인두 화백이 제자이자 아내 류민자 화백에게 ‘예술보다 인생이 더 소중하다’‘영글고 참된 인생이 가득하면 작품도 그 속에서 스스로 익어간다’고 한 조언이 떠올랐다. 그 말이 사무치게 좋았던 것과 별개로 뜻을 이해하게 된 건 지금에서였다.


앞으로는 좀 더 상상력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엔 언어로 묶이지 않은 얼마나 다양하고 수많은 의미가, 정의가 있을까. 삶이, 사람이 있을까. 말보다 훨씬 크고 분명한 것들이 있다. 그렇게 본다면 아무것도 옥죌 필요가 없다. 정말, 너무나 자유롭다.


돌이켜보면 나는 무엇에든 늘 욕심이 많았다. 또 한다면 뭔가 대단한 걸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겉으로는 그런 게 아니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그럴듯한 말, 그럴듯한 이미지를 신경 쓰고 누구인지 모를 ‘모두’를 납득시킬만한 작업을 하길 바랐다. 그렇게 의욕이 너무 앞선 나머지 정작 내 삶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의미와 아름다움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하지만 이제 내 삶의 궤적과 작품이 맞닿아서 나오는 의미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억지스러운 힘을 빼고 작업해나가고 싶다. 아니, 힘이 들어가더라도 자연스러운 작업이 되도록 하고 싶다. 삶을 살아가듯이. 글쎄, 그러다 보면 또 자연스럽게 누군가는 알겠지. 이렇게도 살아가는 사람 있다고.


세상에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듯 그만큼 다양한 예술이 있다. 거기 더하여, 한 사람을 한 단어로 딱 잘라 설명할 수 없듯 한 사람이 이뤄가는 예술도 그렇게 다면적인 거라고 이해하게 됐달까. 개인의 작은 바람이나 아집에서 벗어나 조금 더 넓은 시선으로 스스로를 바라볼 여유가 생긴 건지 모른다.









류민자, <물뫼리>, 캔버스에 아크릴채색, 162.5×130.3cm,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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