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성실함
2022년 연말. 병과 함께하는 삶도 곧 3년 차로 접어들 시점이었다. 조금은 연륜이 쌓이고 탄력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회생활을 하는 친구들도 더 이상 갓 신입이 되었을 때처럼 힘들어하지 않았다. 이렇게 비교하고 싶진 않지만 친구들이 그 삶에 익숙해졌듯이 나도 내 생활에 익숙해진 것 같았다. 역시 뭐든 시간이 지나면 조금은 나아지는 건가. 여전히 마음 한쪽엔 이 삶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반항의 심리가 존재했지만, 그래도 겪고 익숙해진 만큼 더 단단해지고 또 유연해질 수 있는 거라고 여겼다.
작년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을 해낸 일 년이었다. 무엇 하나 하기 힘든 몸으로 작품도 하고 전시도 하고 많은 것을 시도했다. 게다가 작품을 하기 시작하면서는 더욱 하고 싶은 게 많아진 스스로를 발견하기도 했다. 다 할 수 없음에도 왜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아지는 건지 가끔은 스스로가 신기하기만 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순수 평면 아트부터 시작해서 미디어 아트, 그래픽 디자인, 편집, 제책, 일러스트, 사진, 영상, 공간, 오브제 디자인, 작곡, 반주, 글쓰기 등 강하게 불어나는 이 수많은 관심들을 모두 제대로 손 대볼 수 있기는 할지 전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병과 함께하며 습득한 삶의 자세는 복잡하게 생각 말고 천천히, 그때그때 즐기면서 점을 찍어놓는 것이다. '언젠가 연결할 수 있는 때가 있겠지-'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한편 지금까지 무너지고 일어섬의 수많은 반복이 있었고 감사와 믿음을 잃는 순간에는 마음이 어떻게 바닥을 구르는지 절감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은 겪지 않아도 분명한 일이다. 사실 아픈 이후로 이제까지 비틀대고 넘어질 때마다 스스로를 연약하고 한심하게 생각하곤 했다. 나의 다짐, 고백과 달리 정작 필요할 때 믿음이 사라진 모습이 바보 같았다.
하지만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을 지나면 지날수록 삶이란 자체가 그런 거라고 이해하게 되었다. 삶은, 무한한 반복. 그걸 통해 단련되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 어제와 비슷한 오늘, 그러나 어제와는 다른 오늘, 그 작은 다름에서 오는 작지 않은 변화. 작은 것들이 쌓여서 진정한 한 사람, 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과정의 예술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삶이 아닐까. 나는 다시 삶과 예술의 관계를 떠올렸다.
지구가 곧 태양 한 바퀴를 완주할 시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일 낮과 밤을 만들어내면서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았다는 과학적 사실이 새삼 감동적으로 다가왔다. 우주에 매일 내 좌표를 찍어 움직인 경로를 그리면 나도 태양 주위를 완주한 모양이 되겠지, 하는 상상을 했다.
어떤 순간엔 거꾸로 가는 듯이 보일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 년이라는 시간을 성실히 인내하고 견뎌서 결국 그 큰 태양 주위를 완주해 냈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그 사실이, 쳇바퀴 돌고 별다를 것 없는 생처럼 보일지라도 주어진 매일이 새롭다는 믿음과 감사함으로 하루하루 나아가겠다고 다짐하게 만들었다.
삶을 즐기고 싶다. 진정으로 삶을 누리면서 내 안에 기쁨이 가득하기를 바란다. 당연한 것들이 주는 감동을 놓치지 말고서 다시 지금,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무너져도 다시 쌓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나는 한 바퀴 또 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