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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탐구하는 사람

by 안혜빈

오랜만에 인스타에 들어갔더니 피드에 개인전, 단체전을 홍보하는 작가 소식이 줄줄이 보였다. 알고리즘의 영향인지 사이사이 추천 콘텐츠로 처음 보는 작가들의 작품 사진도 있었다. 차근차근 살펴본 그들의 그림은 정말로 사랑스러웠다. 색감과 구도도 아름다웠고 각 작가만의 독특한 스타일은 마음을 산뜻하게 북돋는 힘이 있었다. 특별히 내 눈을 사로잡은 한 작가는 오일 물감으로 마치 색연필로 그린 듯한 효과를 내어서 그림이 더욱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별다를 것 없는 장면이 그의 시선과 손을 통해 현실과 다른 감상을 자아냈다. 작품에 긍정적인 반응이 많았는데, 아마도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흘긋 보아도 그 작가가 꾸준히 작업하고 그리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작품 수가 많을 뿐 아니라 작품마다 완성도도 높았기 때문이다. 한때는 이런 게시물들을 마주하면 마음이 조급하고 심란해지곤 했다. 예전의 나였다면 그를 분명 질투했을 것이다. 많은 작품과 전시 활동이라는, 건강 여건 때문에 내가 마음껏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예전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지금은 딱히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부러운 마음이 한 톨도 없는 건 아니지만 내가 그와는 다른 사람이고 또 스스로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 있어서 그런지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더 와닿았던 것은, 오랜만에 같은 분야에 있는 타인과 그들의 작품을 살펴보면서 스스로에 대해 재발견한 점이었다. 즉 다른 작가들을 통해 나 자신이 ‘그리는 사람’이라기보다는 ‘탐구하는 사람’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니 나의 목적은 단순 그림이 아니었다. 내 진정한 목적은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 그림은 거기 수단에 가까운 목적이었다.

솔직히 가끔 스스로가 뭘 하고 있나 싶을 때가 있다. 건강이 좋지 않으므로 건강을 우선으로 돌보는 걸 차치하더라도 그때그때 관심 가는 다양한 책과 텍스트를 읽고, 영화나 영상/그림을 보고, 메모를 하고, 글을 쓰고, 한참을 생각하기만 한다. 가령 책 속에서 찾아낸 단어들의 조합이나 영화 속 대사, 사람들과의 대화 중에 듣게 된 재미나고 심오한 이야기를 몇 날 며칠 곱씹는다. 이건 무얼까, 그건 왜 그럴까 같은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진 생각들이다. 언뜻 무용한듯한 이 모든 활동은 작업에 중요한 기반이 된다. 하지만 작업—그림을 그리는 것—만을 위한 행위라고 하기엔 조금 과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건 아마 특별한 자극이나 고민 없이도 하루 만에 그림을 완성할 수 있는 까닭일 것이다.

그러나 붓만 휘둘러 그리는 그림은 만족이 될 수 없다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나에게 그런 일은 공허한 재현이고 의미 없는 외침일 뿐이었다. 내 속에 떠도는 이미지들은 깊이 있는 이해와 생각을 통해서 흘러나와야 했다. 다시 말하면 내게 그림은, 제1의 목적(이해)을 위해서 현재 가장 적절하게 느껴지는 수단에 가까운 제2의 목적(표현)인 것이다. 그러니 나는 곧바로 그림을 그리기보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쏟는 게 당연한 사람이었다. 그 일은 때로 지속하기 고단하지만 자체로 즐거운 탐험이 되었다.

내가 이해하고 싶고 표현하고 싶은 것은 삶을 통해 느낀 사랑이다. 그중에서도 중력과 닮은 사랑. 앞서 말했듯이 아무렇게나 붓질 후에 제목으로 ‘사랑’이라 명명해도 작품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적인 납득의 과정이 없는 그 그림을 나는 작품이라 말할 수 없다. 사랑이 뭔지, 내 안에서 사랑이 왜 중력과 연결되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고 하필이면 왜 그것들에 마음이 끌렸는지 더 자세히 파악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단순히 그림에 붙은 제목이 아닌 작품의 정체성으로 깊이가 생길 테니까. 겉으로 게을러 보일 수 있으나 끊임없이 생각하고 부지런히 고민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나는 그런 깊음을 원했다. 재미난 상상이지만 나는 미술의 옷을 입었을 뿐, 만일 다른 전공을 했더라면—이를 테면 과학이나 인문학 등— 그 분야에서 지금과 비슷한 모양으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싶다.


걷다 보면 정리되지 않던 생각들이 종종 마법처럼 한 번에 정리되곤 한다. 마치 에피파니와 같은 순간이다. 며칠 전에는 산책 겸 걷다가 문득 내가 사랑을 탐구하는 사람임을 깨달았다.

“나는 사랑을 탐구하는 사람이다.”

머릿속에 떠오른 정확한 문장은 이런 선언과 같았다. 이 문장을 떠올리기 전에 나는 사랑을 생각하며 걷기 시작했다. 사랑의 형태, 사랑의 태도, 사랑의 가치 등등. 사랑에 대해 헤아리는 일은 아주 자연스러웠다. 게다가 이제껏 나는 삶에 불어오는 다양한 바람에 의해 삶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계속해서 배워가고 탐구하고 있었다.

사랑.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중력과 같은 힘을, 나를 늘 삶으로 이끄는 힘이자 삶의 법칙인 그 힘을 매일 곱씹고 주무른다. 흔들리며 유영하던 내가 그것이 가진 무게에 의해 삶에 뿌리내리며 차츰차츰 자라남을 느낀다. 몸과 마음으로 겪으며 고민하고 이해한다. 그리고 표현한다.

언제가 될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하게 아는 사실이 있다. 이 모든 탐구 결과는 그림으로 나타날 것이다.








Gravity and Love No.1




덧 /

공모전을 위해 그린 이 1번 그림 이후로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 이틀 만에 첫 그림을 그려낸 게 오히려 믿기지 않을 정도다. 아이패드에 습작으로 그려 놓은 그림들이 쌓여 있어서 다음 그림은 얼마든지 쉽게 그릴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작품 제목에 넘버링까지 했건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었나 보다. 솔직히 뭔가 막힌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사랑과 중력에 대해 보다 심도있게 접근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고(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걸 잘 모른다는 생각) 최근 그림에 감정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있어서, 그 막힘은 이러한 변화를 적용하기 위해서였나 싶기도 하다. 겨우 한 작품 그려봤는데.. 난 작업을 참 알 수 없이 하게 되는 것 같다. 일단 시작을 하고 나면 얼마 안 가 다시 또 기다림의 시간이 온다. 손을 어서 단련하고 싶은 이 마음은 나를 믿지 못하는 조바심이겠지. 어쨌든 지금 당장은 표현의 때가 아님은 알겠다. 나는 계속 하던 대로 곱씹어야겠다. 내 빠르기대로 가야지. 할 수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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