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멈춰 선 자리에서 - 3

by Hewii

화창하고 무더운 날씨에 바삐 움직이는 회사원들, 느긋하게 걸어 다니는 목적지를 알 수 없는 행인들은 이마에 방울이 맺힌 채 저마다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는 여전히 서있었다. 그 유독 눈이 가는 그 골목을 보며 잠시 멈춰서 있었다. 내 안의 커져버린 불안이 나를 막아선 듯이, 아니 그를 핑계로 나는 그 자리에 서있었다.


나는 내 삶이 잔잔하고 맑은 호수와 같길 바랐다. 가끔은 거친 바람이 불어와 출렁일지라도 금방 잔잔해지고, 내 안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품으며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깊고 커다란 호수. 잠시 멈춰 선 그 자리에서 내가 그 골목을 바라보듯 내가 만든 이 호수 안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호수에 물을 채우고자 만든 물길에 단단히 박혀있는 커다란 돌이 있었다. 나는 곧 그 돌을 들어 올렸고 수많은 거품과 진흙을 흩트리며 꺼내졌다. 그리고 내가 만든 호수로 다시 깨끗한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떠오른 거품은 마치 누가 반죽이라도 한 것처럼 뭉쳐져 있었다. 나는 조심히 그 거품들을 들여다봤다. 지난 기억들이 스치듯 떠올랐다. 내가 이뤘던 다양한 성취들이 복잡하게 얽혀 나를 지나쳤다. 그런 묵혀진 기억들이 스치며 내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그 기억 안에 나는 선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모히또를 포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옥상에 갔던 날이 떠올랐다.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예전의 그 커다란 화분에는 숲이 만들어져 있었다. 애플민트 였다. 그 숲을 보며 나는 기뻤다. 그 가느다란 한줄기는 끈질기게 뿌리를 뻗었고 그 커다란 공간을 자신만의 세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하얀 수많은 기적들을 피워내 자신의 아름다움과 강함을 뽐내고 있었다.


바람이 수없이 불고, 아주 굵은 빗줄기가 떨어지던 계절이었다. 거리에는 태풍에 가로수들이 쓰러졌던 그 계절을 이 가냘픈 줄기는 수없이 흔들리고 버텨내어 자기 자신만의 꽃을 피워냈다. 한동안 이 녀석은 우리 집 옥상을 가득 채웠다. 겨울이 되어 그 잎이 다 떨어지고 줄기가 얼어붙어도, 따뜻한 봄이 오면 아주 작은 잎부터 피어내었다. 또다시 하얀 기적들을 피워내고, 또 추운 겨울이 올 쯤이면 그 씨앗을 흩트려 주변의 화분에서 조차, 봄날의 작은 이파리를 피어냈다. 그리고 지나온 나의 삶이 떠올랐다.


스쳐가는 그런 기억들이 길을 막던 불안을 밀어내듯, 나는 자연스럽게 그 골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골목에 첫 발을 디뎠을 때 왠지 모를 짜릿함이 느껴졌다.


처음 와보는 길이었다. 이런 공간이 있었나 싶었을 정도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하지만 길을 찾아내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또렷하게 알고 있다면, 그 방향으로 가면 되었다. 골목의 풍경은 재밌었다. 처음 보는 풍경들이었다. 처음 보는 집, 그리고 사방으로 뻗어있는 또 다른 골목들.


생각지도 못한 곳에 편의점이 있어, 마침 목이 말라 물을 한병 사들었다. 이 골목길이 어디까지 이어져있을지, 이 더위에 얼마나 헤맬지 몰라 차가운 물을 한 병 샀다. 그리고 한 모금 마신 후 나는 다시 내 방향에 맞추어 골목을 걸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이었지만, 골목골목, 필로티 형태의 주택들에는 사람의 흔적이 아주 많았다. 주차된 차들은 먼지 없이 깨끗했고, 배달부의 오토바이는 바쁘게 돌아다녔다.


생각하지도 못하게 언덕을 만나고, 내리막을 만났다. 나는 마음에 드는 풍경을 따라 하지만 방향에 맞춰 길을 걸었다. 길은 잘 정돈되어 있었고, 중간중간 서있는 나무들은 푸르게 그 잎이 흔들리고 있었다. 멀지 않은 동네에 이런 곳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다. 언덕 위 높이 있는 동네의 존재가 먼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지만, 막상 그 골목을 다녀보니 그 빼곡하게 보였던 주택들이 각 개성을 뽐내고 있었다. 그 풍경에 빠져 걷다 보니 너무나 익숙했던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간을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아는 길로 왔으면 이미 집에 도착했을 시간인데, 아직 더 걸어가야 했다. 하지만 이 앞의 길은 모르는 길이 없을 정도로 나는 집으로 가는 대부분의 길을 알고 있다. 몸이 더 이상 걸으면 안 된다는 신호를 보내 나는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나는 점심의 순댓국을 잊은 채,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잔잔하게 틀고 잠시 누웠다.




수고했어.


매거진의 이전글2.애플 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