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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eebird Apr 19. 2023

더 좋은 제목 없어?

(방송국에 살다보면)

‘애들은 재웠수'


비디오 대여점이 동네마다 있던 시절, ‘에로영화’ 코너에서 본 제목이다. 당시 에로 영화 제목엔 여러 패러디가 유행했지만 내가 최고로 꼽은 건 이거였다. 비속어를 쓰지도 않았고 너무 직설적이지도 않고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고 상상하게 만드는 제목 아닌가.

장난하자는 건 아니지만, 뉴스 기사 제목 뽑는 것도 비슷한 속성이 있다. 핵심을 짚어야 하고 금기어를 써서도 안 되고 외국어를 지양하고 그러면서도 쉬워야 한다. 이렇게 써놓으면 그게 가능한가 싶지만 하여튼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

뉴스 진행 PD였던 10여 년 전 어느 날 오후, 리포트 제목이 쭈욱 적힌 큐시트를 놓고 데스크와의 ‘밀당’이 시작됐다. 그 시절은 PD가 1차로 제목을 모두 뽑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당시엔 제목이 열 글자를 넘기지 말아야 했다. 여기서 ‘밀당’이라 함은, 데스크가 더 좋은 아이디어로 제목을 바꾸거나, 아니면 PD가 뽑은 게 마음에 들지 않는데 그렇다고 본인이 신박한 아이디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더 좋은 걸 뽑아내 보라고 PD를 압박하는 시간이다. 그날은 후자였다. 쉽지 않은 기사였다. 지금이야 보통명사가 된 ‘태블릿 PC’, 이게 막 나와서 큰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뭐 이런 내용. 이걸 열 글자 이내로 뭐라고 뽑나..

“효엽씨, 태블릿 PC가 뭐야?”
(무식&위축)“뭐.. 이런이런 거라고 합니다.”
“그럼 어쩔 거야? 뭐라고 뽑을 거야?”
(횡설수설)“아니 이게.. 초소형까진 아니고..터치펜으로 화면을 누르고 하니까..”
“그런 복잡한 거 말고..한 마디로 뭐 없어?”
(체념)“새로 나온 디바이스라 대체어도 없는데 그냥 태블릿이라 할까요?”
“뭔가 있을 거야.. 난 효엽씨가 뭔가 아름다운 제목을 뽑아줄 거라 생각해.”
(짜증)“아니, 이게 막말로 손바닥 컴퓨터란 건데..”
“어?? 손바닥 컴퓨터??? 좋다!!!”
(당황)“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고요. 그걸 제목으로 뽑자고요?”
“왜? 좋은데? 확 와 닿잖아. 거 봐, 난 효엽씨가 생각해낼 줄 알았어.”

결국 ‘손바닥 컴퓨터’라고 나갔다. 그 때는 좀 민망하고 마뜩찮았는데 몇 년이 지나고 다시 편집 일을 하다 보니 내가 생각해도 잘 뽑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좀 드는 거다. 어린 시절, 뉴스 제목엔 뭔가 유식하고 멋있는 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었나보다. 손바닥이 태블릿보다 어때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재미있지 않나. 내가 잘 모르니 쉽게 말을 바꾸지 못하는 거였다. 실제로 이후 손바닥TV, 손바닥 OO, 이런 작명들이 나오기도 했다.    

10년도 더 지난 2021년의 어느 날. 문화부 리포트가 하나 큐시트에 올라왔다. 무려 ‘디지털 휴먼’과 ‘홀로그램’ 기술이 만나 작고한 가수 김현식 콘서트를 연다는 이야기. 제목을 뭘로 할까, 더구나 문화 기사는 감각도 더 필요한데.. 옛날 그 때와 비슷한 고민이 시작됐지만 이번엔 길지 않았다. 홀로그램이란 말에 얽매일 필요 없이 이 리포트를 볼 때 제일 와 닿는 한 마디가 뭘까 생각하다 이렇게 뽑았다. “아, 김현식이다!”. 홀로그램으로 재탄생한 김현식이 노래하는 리포트 화면 위에 “아, 김현식이다!” 여섯 글자가 떠 있는데 홀로그램이니 신기술이니 뭐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1998년 6월, 故정주영 현대 회장이 소 5백 마리를 몰고 군사분계선 넘어 북한으로 걸어가는 지상최대의 퍼포먼스가 있었다. 당시 한 선배가 그 광경을 보러 임진각 주변에 나와 있는 실향민들의 심정을 담는 기사를 제작했다. 50년 막힌 고향 가는 길, 마지막에 나온 실향민은 이렇게 한 마디 했다. 정말 소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라고. 그러면 고향에 갈 수 있으니까. 그날 기사 제목은 볼 것도 없었다. <차라리 소가 됐으면..> 더 이상의 제목이 있을까.

뉴스 기사 제목 뽑기는 이렇듯 ‘핵심을 짚어 쉽게 풀어내’는 걸 배우는 현장이었다. 내용과 상관없이 ‘헉!’ 으로 시작되는 낚시성 제목에 많은 사람이 길들여진 시절이지만 지금도 제목 하나, 단어 하나에 때로는 머리를 쥐어짜고 때로는 가슴으로 공감하려 애쓰는 편집부 기자들이 있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건 뉴스 만드는 사람뿐 아니라 어떤 일을 하든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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